김병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530
한자 金炳淳
영어공식명칭 Kim Byeongsun
이칭/별칭 김윤란(金允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01년 9월 - 김병순 경주군수 겸 각광감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907년 2월 17일 - 김병순 금연상채회 재무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김병순 대한협회 대구지회 회원 활동
출생지 의성 - 경상북도 의성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민족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금연상채회 재무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개설]

김병순(金炳淳)[?~?]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가계]

김병순은 경상북도 의성군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김윤란(金允蘭)이었으나 1906년 4월 무렵 개명하였다.

[활동 사항]

김병순은 1901년 9월 경상북도 경주군수 겸 경상북도 각광감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1903년 6월 경상북도 균조위원으로 있으면서 공전 포탈 혐의로 해임되었다. 1906년 1월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 계몽운동 단체인 문회(文會)에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8월에는 대구농공은행 주주가 되었다.

1907년 1월 29일 문회는 특별총회를 열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결의하였다. 1907년 2월 17일 대동광문회 회원이었던 김병순광문사 사장이자 대동광문회 부회장이던 김광제(金光濟),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을 비롯한 회원 강신규(姜信圭)·강영주(姜永周)·장상철(長相轍)·심정섭(沈廷燮)·김우근(金遇根)·서병오(徐丙五)·윤하선(尹夏璿)·정재덕(鄭在悳)·이종정(李鍾楨)·길영수(吉永洙)·이우열(李遇烈)·정규옥(鄭圭鈺)·추교정(秋敎廷) 등과 함께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 설립을 주도하여 재무를 맡았다. 또한 대구 북후정(北堠亭)에서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를 공표하고 국채 보상에 필요한 모금 활동을 결의하였다. 이후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가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리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김병순국채보상운동을 격려하기 위하여 금연상채회에서 고령향교와 고령단연상채회, 경상북도 각 군의 국채의무금수합소에 보낸 공고문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1908년 양력 8월 26일 서울의 경성지원금총합소에서 전국 회의를 소집하는 공고문을 공동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1908년에는 대한협회 대구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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