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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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杲 |
영어공식명칭 | Choi Go |
이칭/별칭 | 추운(追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도성탁 |
출생 시기/일시 | 1924년 - 최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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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39년 - 최고 경복중학교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1943년 - 최고 흑백당 활동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최고 대통령표창 수상 |
몰년 시기/일시 | 1988년 - 최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최고 건국훈장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대구 -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 |
학교|수학지 | 경복중학교 - 서울특별시 |
학교|수학지 | 보성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서울 - 서울특별시 |
묘소 | 국립신암선열공원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71길 33[신암동 산27-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본관 | 전주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고(崔杲)[1924~1988]는 1924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의 부유한 집안에서 최해윤의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아호는 추운(追雲)이다. 일제강점기 흑백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 대구에서 소설가 및 교사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최고는 왜관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1939년 서울의 경복중학교[현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동급생 이현상·장의찬·명의택·주낙원 등과 조국 광복을 위하여 친일파 및 일본인 고관을 차단하기로 결의하였다. 1941년 항일학생결사인 흑백당(黑白黨)을 결성하였다. 기본 강령으로는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 절대 비밀, 책임 완수 등을 정하였으며, 이때 최고는 남상갑과 함께 자금책의 일을 맡았다.
1943년 흑백당의 동조자였던 김창흠이 귀향 도중 일제를 욕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가택수색을 당하는 과정에서 흑백당에 관한 문서가 발각되었다. 당원들은 긴급 모임을 갖고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투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추격에 의하여 당원 전원이 베이징, 선양, 신민, 청더 등지에서 피체되어 국내로 이송되었다. 최고는 1944년 12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 수감 생활 중 해방이 되어 풀려났다.
해방 이후 최고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한영고등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다. 1964년 대구로 내려와 대구중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대구 시내에 살고 있었으나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최광렬과 친하게 지내며 때로는 최광렬의 집 단칸방에서 묵기도 하였다. 최고가 국우동 끝자락 외딴집에 살고 있을 때 칠곡중학교에서는 시인 전상렬이 국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관사가 허름하여 교장이 살지 않자 가족을 불러 관사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한다. 최고는 청마 유치환, 목인 전상렬과 더불어 팔거천에서 천렵을 하여 매운탕을 안주로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후에 박해수, 도광의 등 후배 문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최고는 1988년 8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1955년 『예술집단』[현대출판사]에 『ㅅ부인의 엉덩이』가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묘소]
[상훈과 추모]
최고는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고 1984년 대구시문화상[문학 부문]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