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8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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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同券番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석배 |
설립 시기/일시 | 1946년 1월 - 대동권번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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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47년 1월 - 대동권번 주식회사 대동권번으로 전환 |
개칭 시기/일시 | 1948년 10월 15일 - 대동권번에서 육예사로 개칭 |
성격 | 권번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 중구에 있었던 기생 단체.
[설립 목적]
대동권번(大同券番)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고, 교육과정을 수료한 기생들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지휘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변천]
1946년 1월 중순 예우회(藝友會)를 해산하고 새롭게 출발한 대동권번(大同券番)은 예기 약 300명을 양성할 목적으로 일제강점기 때 달성권번에서 가르쳤던 박지홍 명창을 초빙하여 1946년 1월 15일부터 예기 양성생을 모집하였다. 당시 대동권번의 역원은 회장 김애산(金愛山), 부회장 정남정(鄭南汀), 평의원 이춘정(李春汀), 간사 전명득(全明得), 학예부장 박지홍(朴枝洪), 사범 방준호(方浩俊)·박동진(朴東鎭), 총무 조병규(趙炳奎)였다.
대동권번은 1947년 1월 주식회사 대동권번으로 전환하였고 초대 사장 김문식, 전무 윤주태 체제로 바뀌었다. 당시 소속 기생은 허가자 27명에 가허가자(假許可者) 98명을 포함하면 총 125명이었는데 1947년 2월 25일부터 동기(童妓) 약 200명을 모집하였다. 1947년 7월 당시 대동권번은 대표 전명득을 비롯하여 임소향(林素香)과 박초향(朴楚香)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동권번은 1947년 12월 2일 총회에서 봉건적 성격을 띠고 있는 대동권번을 해산하는 동시에 민족 고전 예술을 육성 보급하는 기관으로 새로 발족하기로 하고, 대동권번에서 육예사(育藝社)로 변경하기로 정한 뒤 1948년 10월 15일 무렵 ‘육예사’로 명칭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동권번은 1946년 2월 26일부터 2월 28일까지 3일 동안 대구극장에서 창립 기념 공연으로 창극 「춘향전」[5막 4장]과 풍류, 승무를 공연하였다. 1946년 4월 1일부터 4월 4일까지 4일 동안 대구극장에서 국악 명창 대회를 개최하였고, 1946년 6월 1일부터 6월 4일까지 4일 동안 대구공회당에서 개최한 ‘조선 창극 대공연’에서 「춘향전」, 「심청전」, 「흥보전」, 「장화홍련전」을 상연하였다.
1947년에는 ‘춤과 노래의 밤’[대구극장] 과 ‘이재민 구제 전국 유행가급 음악 콩쿨대회’[대구공회당]에 대동권번의 일류 명창들이 찬조 출연하였고, ‘구 왕궁 아악 대공연’[키네마구락부]에 특별 출연을 하였으며, 전국명창경연대회[만경관]에 출연하였다. ‘이재민 주택 건설 기금 연주회’[대구극장]에는 80여 명이 출연하여 기금을 기부하였다. 1948년에는 5막 10장의 창극 「만고열녀」[키네마구락부]를 상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