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성화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296
한자 雉省火縣
영어공식명칭 Chiseonghwa-hyeon
이칭/별칭 미리(美里),해안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최용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행 시기/일시 505년연표보기 - 압량군 치성화현으로 시행
개정 시기/일시 757년 - 치성화현에서 해안현으로 변경

[정의]

505년부터 757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일대에 있었던 삼국시대 및 남북국시대 지방 행정 구역.

[개설]

치성화현은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아래 마을이다. 팔공산 일대는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군, 경상북도 칠곡군,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 군위군 등으로 갈 수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신라는 압량국[압독국]을 복속하면서 그곳에 압량군(押梁郡)을 설치하였으며, 이 때 팔공산 아래 마을 일대에 치성화현(雉省火縣)을 설치하고 압량군의 영현(領縣)으로 편제시켰다.

[관련 기록]

1.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지리지 장산군 조(獐山郡條)

해안현(解顏縣)은 본래 치성화현(雉省火縣)이다. 미리(美里)라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에 이른다”

2. 『고려사(高麗史)』 지 (志) 권제11(卷第十一)

해안현(解顔縣)은 본래 신라(新羅)의 치성화현(雉省火縣)미리(美里)라고도 한다.】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경주에〉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수성감무(壽城監務)가 겸하게 하였다.

3. 『세종실록 지리지』 대구군(大丘郡)

“(대구군) 해안현(解顔縣)은 본디 치성화현(雉省火縣)미리(美里)라고도 한다.】 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무오년에 모두 경주(慶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2년 경오에 비로소 수성(壽城)·해안(解顔) 겸 감무(兼監務)를 두었는데, 본조(本朝) 태조 3년 갑술에 감무(監務)를 혁파하고 대구(大丘) 임내(任內)를 삼았으며, 1세(世)를 지나서 도로 경주(慶州)에 붙였다가, 태종 14년 갑오에 다시 대구에 붙였다. (중략) 공산(公山)해안현(解顔縣) 북쪽 11리 거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父嶽)이라 일컫고, 중악(中嶽)에 비겨 중사(中祀)로 삼았는데, 지금은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중략) 해안현(解顔縣)의 호수는 1백 98호, 인구가 1천 2백 단(單) 3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1명, 진군(鎭軍)이 1백 단(單) 5명, 선군(船軍)이 4백 54명이다. (중략) 해안(解顔)의 성이 5이니, 모(牟)·백(白)·하(河)·신(申)·정(丁)이며, 내성(來姓)이 3이니, 제(諸)·진(秦)·박(朴)이고, 속성(續姓)이 1이니, (중략) (대구군)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해안현(解顔縣) 동촌(東村) 여리(汝里)에 있고, 하나는 수성현(壽城縣) 남촌(南村) 상원동(上院洞)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변천]

통일신라 이전에는 치성화현(雉省火縣) 또는 미리(美里)라고 불렸다. 신라는 경산 일대에 있었던 소국 압량국(押梁國)[압독국(押督國), 지금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을 정복하고, 이곳에 압량군(押梁郡)을 설치했다. 이후 505년(지증왕 6)에는 주(州)·군(郡)·현(縣)제가 시행되면서, 압량군에 치성화현, 마진량현, 노사화현 3영현을 두었다. 이 때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쪽의 동촌(東村) 일원을 치성화현(雉省火縣)으로 편제하였다. 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영향으로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이 변화되었다. 이때 압량군은 장산군(獐山郡)으로, 치성화현해안현(解顏縣)으로 바뀌었다.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봉무동, 도동 일대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도 해안현(解顏縣)의 지명은 그대로 사용되었다. 1018년(현종 9) 동경유수관의 속읍이 되었으며, 1390년(공양왕 2)에 감무가 설치가 되었으며, 수성군의 감무가 그 직을 겸임하였다. 1419년(세종 원년) 달성이 군(郡)으로 승격하면서, 해안현도 수성현과 함께 달성군의 속현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해안현(解顔縣)의 호수는 1백 98호, 인구가 1천 2백 단(單) 3명이다. 조선 숙종 10년(1684년) 대구도호부 영현으로 편입과 동시에 해서부면, 해북촌면, 해동촌면, 해서촌면으로 분면되었다. 1914년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부·군·면 폐합에 따라 시가지는 대구부로 칭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으로 칭하고 군수를 두었다. 이때 해안현은 수성, 달서, 성북, 가창, 공산, 성서, 월배, 다사, 하빈, 화원, 옥포, 논공, 현풍, 유가, 구지와 함께 면으로 편성되었다. 1940년에는 동촌면으로 개칭하였다. 1957년에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