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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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解顔縣 |
영어공식명칭 | Haean-hyeon |
이칭/별칭 | 치성화현(雉省火縣),미리(美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최용석 |
[정의]
757년부터 1684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경덕왕은 지방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지방의 편제를 군현제로 재편하였다. 이 때, 압독군이 장산군(獐山郡)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영현이었던 치성화현(雉省火縣)도 해안현(解顏縣)으로 바뀌었다.
[관련 기록]
1.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지리지 장산군 조(獐山郡條)
“해안현(解顏縣)은 본래 치성화현(雉省火縣)이다. 미리(美里)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에 이른다.”
2. 『고려사(高麗史)』 지 (志) 권제11(卷第十一)
해안현(解顔縣)은 본래 신라(新羅)의 치성화현(雉省火縣)【미리(美里)라고도 한다.】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경주에〉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수성감무(壽城監務)가 겸하게 하였다.
3. 『세종실록 지리지』 대구군(大丘郡)
“(대구군) 해안현(解顔縣)은 본디 치성화현(雉省火縣)【미리(美里)라고도 한다.】 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무오년에 모두 경주(慶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2년 경오에 비로소 수성(壽城)·해안(解顔) 겸 감무(兼監務)를 두었는데, 본조(本朝) 태조 3년 갑술에 감무(監務)를 혁파하고 대구(大丘) 임내(任內)를 삼았으며, 1세(世)를 지나서 도로 경주(慶州)에 붙였다가, 태종 14년 갑오에 다시 대구에 붙였다. (중략) 공산(公山)【해안현(解顔縣) 북쪽 11리 거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父嶽)이라 일컫고, 중악(中嶽)에 비겨 중사(中祀)로 삼았는데, 지금은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중략) 해안현(解顔縣)의 호수는 1백 98호, 인구가 1천 2백 단(單) 3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1명, 진군(鎭軍)이 1백 단(單) 5명, 선군(船軍)이 4백 54명이다. (중략) 해안(解顔)의 성이 5이니, 모(牟)·백(白)·하(河)·신(申)·정(丁)이며, 내성(來姓)이 3이니, 제(諸)·진(秦)·박(朴)이고, 속성(續姓)이 1이니, (중략) (대구군)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해안현(解顔縣) 동촌(東村) 여리(汝里)에 있고, 하나는 수성현(壽城縣) 남촌(南村) 상원동(上院洞)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변천]
해안현(解顏縣)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치성화현(雉省火縣) 또는 미리(美里)라고 불렸다. 신라는 경산 일대에 있었던 소국 압량국(押梁國)[압독국(押督國), 지금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을 정복하고, 이곳에 압량군(押梁郡)을 설치했다. 이후 505년(지증왕 6)에는 주(州)·군(郡)·현(縣)제가 시행되면서, 압량군에 치성화현, 마진량현, 노사화현 3영현을 두었다. 이때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쪽 동북쪽의 동촌(東村) 일원을 치성화현(雉省火縣)으로 편제하였다. 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영향으로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이 변화되었다. 이때 압량군은 장산군(獐山郡)으로, 치성화현은 해안현(解顏縣)으로 바뀌었다.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봉무동, 도동 일대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도 해안현(解顏縣)의 지명은 그대로 사용되었다. 1018년(현종 9) 동경유수관의 속읍이 되었으며, 1390년(공양왕 2)에 감무가 설치가 되었으며, 수성군[지금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감무가 그 직을 겸임하였다. 1419년(세종 원년) 달성이 군(郡)으로 승격하면서, 해안현도 수성현과 함께 달성군의 속현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해안현(解顔縣)의 호수는 1백 98호, 인구가 1천 2백 단(單) 3명이다. 1684(숙종10)년 대구도호부 영현으로 편입과 동시에 해서부면, 해북촌면, 해동촌면, 해서촌면으로 분면되었다. 1914년 3월 1일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부·군·면 폐합에 따라 시가지는 대구부로 칭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으로 칭하고 군수를 두었다. 이때 해안현은 수성, 달서, 성북, 가창, 공산, 성서, 월배, 다사, 하빈, 화원, 옥포, 논공, 현풍, 유가, 구지와 함께 면으로 편성되었다. 1940년에는 동촌면으로 개칭하였다. 1957년에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해안현(解顏縣)의 지명은 이 일대의 평야와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근 금호평야가 있어 조선시대에서는 물산이 모이는 곳이었고, 이에 해안창(解顔倉)이 금호강 유역에 있어 조운(漕運)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대구에서 해안현(解顏縣) 지역을 지나서 팔공산(八公山)과 동화사(桐華寺) 일대를 갈 수 있었으며 신령(新寧)[현재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으로 갈 수 있었다. 또한 동서로는 하양(河陽)·칠곡(漆谷)과 연결된다.
[의의와 평가]
해안현(解顏縣)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소국인 압독국(押督國) 지역으로 추정되며, 신라가 소국 정벌을 통해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데 디딤돌이 된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