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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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農民運動[東區] |
영어공식명칭 | Peasant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식민지지주제에 맞서 농민들이 일으킨 지주에 대한 저항과 항일 투쟁.
[동구 지역 농민운동]
일제강점기 식민지 농업정책의 운영에서 일제는 1910년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지주의 소유권을 강화한 식민지지주제를 확립하고,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일본 자본과 지주 중심의 식민지지주제를 확대·강화하였다. 식민지농업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조선 농민은 토지에서 내몰려 궁박한 처지로 전락하였다. 이에 식민지농업정책에 저항함으로써 농민의 사회적 지위를 찾으려는 농민운동이 1920년대 전반기에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후반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이 포함된 당시 달성군의 인구를 보면, 전체 호수 25,828호에 인구수 133,285명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민족별 인구 구성을 보면, 조선인이 25,514호에 131,995명, 일본인 호수 285호에 1,213명, 중국인이 29호에 77명이었다. 조선인이 압도적 비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34년 달성군 농민의 계급 구성율을 보면, 지주 2.9%, 자작농 13.7%, 자소작농 28.7%, 소작농 54.4%를 나타냈는데, 자소작농과 소작농을 합하면 소작농가가 무려 83.1%에 달했다. 이 통계를 보면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이 포함된 당시 달성군의 농민들의 생활상 충분히 상상된다. 특히, 달성군내 일본인 거주가 상대적으로 많은 곳은 동구관내 해안면과 서부방향의 현풍면이었다. 그에 따라 일제강점기 농업에서 동구 관내 해안면 농민들의 경제생활의 경우 생산자인 농민이 토지에서 내몰리는 모순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1923년 달성군 가창면의 농업협동회의 결성과 소작운동,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의 대구노동공제회로 조직 전환 등이 일어나면서 동구 관내 지역 중에서도 해안면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농민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1923년 3월 대구노동공제회 주최로 열린 농민대회에서 농민문제를 주요 과제로 설정하고, 달성군내 각면 소작인조합 결성을 추진하는 활동 방향이 수립되었다. 그에따라 1925년 3월 무렵 이미 동구관내 해안소작인조합이 결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