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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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琵瑟山- 佛敎 遺産 |
영어공식명칭 | Buddist Cultureal Heritage in Biseulsan Mountain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비슬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불교 문화유산.
[개설]
비슬산은 대구광역시의 달성군 가창면·옥포읍·유가읍과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걸쳐 있다. 비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天王峰)[1,088m]이며, 그 다음이 대견봉(大見峰)[1,059m]이다. 비슬산의 최고봉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으나, 2014년 8월 8일부터 천왕봉을 최고봉으로 공식 사용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현풍현 읍지(玄風縣邑誌)』에는 “비슬산은 일명 포산(苞山)으로 현풍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청도와 대구 방향에서 뻗어 온 산맥이 남쪽으로 창녕군의 화왕산(火旺山), 서쪽으로 창녕군의 소백산(小白山)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분지 지형을 이룬 대구광역시의 북쪽을 감싸고 있는 산이 신라의 중악(中岳)인 팔공산이라면, 비슬산은 그 남쪽을 둘러싼 형국을 하고 있다. 또한, 팔공산이 부악(父岳) 즉 아버지 산이라면, 비슬산은 그에 대응하는 어머니 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슬산은 신라 오악 중의 하나인 중악 팔공산과 함께 대구의 영산(靈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소슬산(所瑟山)에서 비슬산(毗瑟山)으로]
비슬산은 일명 포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비슬산은 한문으로 쓸 때는 ‘비슬산(毗瑟山)’, ‘비슬산(琵瑟山)’, ‘비슬산(枇瑟山)’ 혹은 소슬산(所瑟山) 등으로 달리 표기되었다. 포산 또한 마찬가지로 ‘포산(包山)’ 또는 ‘포산(苞山)’으로 다르게 사용하였다. 일연(一然)[1206∼1289]은 『삼국유사(三國遺事)』 「포산 이성」조에서 포산의 명칭을 설명하면서, “향인(鄕人)들이 소슬산(所瑟山)이라고 하는데, ‘소슬’은 범어(梵語)로 ‘포(包)’이다”라고 하였다. 범어인 ‘소슬’이 ‘포’와 같은 뜻이 되는 까닭은 잘 알 수 없지만, ‘소슬’은 우리말의 ‘솟을’이며, 산이 높이 솟아 있는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또, ‘포(包)’는 ‘싸다’는 뜻이므로, ‘쌀산’은 ‘솟을산’과 같은 음가를 가진다. 따라서, 원래 ‘소슬산’이 ‘바슬산’으로, 다시 ‘비슬산’으로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구의 옛 이름은 달구벌(達句伐)인데, ‘달구’는 경상도 말로 ‘닭’을 가리킨다. ‘비슬’은 닭 머리에 솟은 ‘벼슬’과 같은 뜻이므로, ‘비슬산’은 ‘벼슬산’과도 통한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그려진 비슬산의 모습은 닭의 벼슬과도 흡사하다. 또, 비슬산은 산의 생김새가 전통 악기인 비파나 거문고와 비슷하기 때문에 ‘비슬산(琵瑟山·枇瑟山)’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처럼 비슬산은 산이 높게 솟아 있는 모습에서 ‘솟을산’, 닭의 벼슬처럼 생긴 형상에서 ‘벼슬산’, 거문고와 비슷한 형태여서 ‘비슬산(琵瑟山·枇瑟山)’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한편, 비슬은 비슬노천(毗瑟怒天) 곧 비쉬누(Visnu)천의 음역으로 본래 인도의 신을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여러 태양신 중의 하나였으나 점차 신성이 강화되어 인간의 안전과 주거를 약속하는 신이 되었다. 현재 힌두교에서도 3신(神)의 하나로서 생성의 브라흐만, 유지의 비쉬누, 파괴의 시바신으로 함께 숭배되고 있다. 이중 브라흐만은 범천(梵天)으로 비쉬누는 범천의 모태로서 함께 불교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비슬산은 원래 ‘대구의 남쪽에 닭의 벼슬처럼 우뚝 솟아 있는 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후 불교가 전래됨에 따라 ‘솟을산[바슬산]’에 불교식 의미가 첨가되면서, 비슬산(毗瑟山)이라는 한자 표기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윗 부수가 같고 둘 다 악기와 연관이 있는 비슬(琵瑟)이 쓰이기도 했다. ‘포산(包山)’ 또는 ‘포산(苞山)’의 표기도 ‘포’가 서로 통용되는 글자이므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다만, 『삼국유사』 등 고려 시대 사료에 쓰인 ‘포산(包山)’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비슬산은 산악 신앙의 성소(聖所)]
1. 비슬산의 산악 신은 정성 천왕(靜聖天王)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신성성을 부여하고 그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명산대천에 대한 중에서도 산악신앙의 비중이 가장 높았고, 숭앙심도 매우 깊었다. 산악 제사의 대상은 산악 그 자체가 아니라 각 지역을 수호하는 산악 신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에는 삼산과 오악 이하 명산대천 50개소를 기록해 두었다. 그 중에서 산악은 팔공산과 지리산 등을 비롯해 35개소로 가장 비중이 높았다. 아쉽게도 비슬산은 『삼국사기』 「제사」지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대 이래로 전통적인 산악 신앙의 성소(聖所)로 숭앙받던 곳이었다. 『삼국유사』 「포산 이성」조에는 비슬산의 산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태평 흥국(太平興國) 7년 임오(壬午)[982년]에 … 산신의 이름은 정성 천왕(靜聖天王)으로 일찍이 가섭불(迦葉佛)의 시대에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염원이 있어, “산 속에서 1천 명의 출세를 기다려 남은 과보를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삼국유사』 권5, 피은8, 「포산 이성」조]
고려 시대 비슬산의 산악 신은 ‘정성 천왕’으로 불렸다. 정성 천왕은 가섭불 시대에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산 속에서 1천 명의 출세를 기다린 후 과보를 받겠다고 다짐한 호불적인 산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정성 천왕은 신라 시대 산악신앙의 전통을 계승한 존재로, 원래는 비슬산의 산악 신이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산악은 각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 세력의 성소였고, 산악 신은 그 세력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전통적인 산악신앙의 대상이었던 산악 신은 불교가 정착, 확산하면서 점차 불교적인 호법신(護法神)으로 전환되어 갔다. 예를 들어 가야산 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해인사가 창건되면서 그 경내의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에 모셔지게 되었다. 불교의 수용 이후 불교와 전통적인 산악신앙의 습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명산대천에 다수의 사찰이 건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비슬산 일대에도 고대의 유력한 정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달성군 유가읍 양리 양지편 마을 일대에 분포한 양리 고분군과 비슬산에서 현풍 쪽으로 뻗은 능선 정상부에 위치한 초곡리 산성[와우산성]이 그것을 웅변해 준다. 양리 고분군과 초곡리 산성은 5∼6세기에 현풍 지역의 정치 세력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비슬산의 산신인 정성 천왕은 처음에는 현풍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정치 세력의 숭앙을 받았을 것이다. 이 산악 신을 제사지내던 장소는 비슬산의 최정봉인 천왕봉이거나, 최정봉으로 인식되었던 대견봉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산악신앙의 성소였던 비슬산의 산신은 불교가 정착하면서 불교에 도움을 주는 호불적인 선신(善神)으로 전환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2. 정성 천왕, 불교적인 호법신에서 성황신으로 변모하다.
전통적인 산악 신에서 불교적인 호법신으로 변했던 정성 천왕은 조선 시대가 되면 다시 현풍 지역을 수호하는 성황신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성황사(城隍祠)는 비슬산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정성 대왕 신(靜聖大王神)은 장마나 가뭄, 역질이 있을 때에 기도하면 문득 응답이 있으므로 제사지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모인 종이와 베는 활인서(活人署)에 보내게 했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7, 현풍현, 사묘 조]
조선 시대 현풍현의 성황사는 비슬산에 있었고, 이곳에 모셔진 성황신은 ‘정성 대왕 신(靜聖大王神)’이었다. ‘정성 대왕 신’은 『삼국유사』 「포산 이성」조의 ‘정성 천왕’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특히, 성황사의 정성 대왕은 장마나 가뭄, 전염병 등이 있을 때 기도하면 영험이 많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바친 제물로 모인 종이와 삼베는 활인서(活人署)에 보낼 정도였다. 활인서는 한양 도성의 병자와 오갈 데 없는 사람을 치료하고 의식을 지급하는 빈민 구제 기관이었다.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 사이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지금 사(祠)는 폐지하고 단(壇)을 설치해 현 남쪽 2리에 옮겨서 건축했다[今廢祠設壇 移築縣南二里]”고 한다. 성황사의 사당을 폐지하고 단으로 만들어 비슬산에서 현풍현 남쪽 2리로 옮겼던 것이다.
비슬산은 전통적인 산악신앙의 성소였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산악신앙과 불교가 습합하는 무불습합(巫佛拾合)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비슬산의 산신은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인 ‘정성 천왕’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유불 교체가 이루어지는 조선 시대가 되면서, 정성 천왕은 성황신인 ‘정성 대왕 신’으로 전환되었다. 비슬산의 산신은 전통적인 산악 신에서 불교적인 호법신, 다시 유교적인 성황신으로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꾸준히 현풍 지역 사람들의 숭앙과 존숭을 받는 존재였다.
[비슬산, 불교 신앙의 성지(聖地)가 되다]
1. 의상(義相) 화엄 십찰인 옥천사(玉泉寺)가 창건되다.
비슬산이란 명칭은 신라 시대부터 사용되었고,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인 의상이 법을 전한 ‘화엄 십찰’ 중에서 ‘비슬산 옥천사’가 창건되었다. 의상의 화엄 십찰과 관련하여 등장하고 있다. 『삼국유사』 「의상 전교」조에는 ‘비슬산 옥천사(毗瑟山玉泉寺)’, 최치원(崔致遠)이 쓴 『당 대천복사 고 사주 번경대덕 법장화상전(唐大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尙傳)』에는 ‘비슬산 옥천사(琵瑟山玉泉寺)’로 전해온다. 비슬산은 신라 시대 화엄 불교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해동 화엄 대학의 장소로 10산이 있다. 중악인 공산의 미리사(美理寺), 남악인 지리산의 화엄사(華嚴寺), 북악의 부석사(浮石寺), 강주(康州) 가야산의 해인사와 보광사(普光寺), 웅주 가야협(迦耶峽)의 보원사(普願寺), 계룡산의 갑사(岬寺), 삭주(朔州)의 화산사(華山寺), 양주 금정산의 범어사(梵魚寺), 비슬산의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산(母山)의 국신사(國神寺), 한주 부아산(負兒山)의 청담사(靑潭寺) 등 10여 곳이다.[최치원, 『당 대천복사 고 사주 번경대덕 법장화상전』]
화엄 십찰은 10찰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10산 12사이다. 따라서 10찰은 10개의 사찰이라는 의미보다는 10을 만수(滿數)로 보는 화엄 사상에 의거하여 전국의 중요한 곳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삼국유사』「의상 전교」조에는 태백산부석사,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옥천사, 금정산범어사, 남악 화엄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최치원의 저술과 「의상 전교」조 두 곳 모두 비슬산옥천사가 포함되어 있다. ‘화엄 십찰’은 부석사가 676년(문무왕 16)에 창건되었지만, ‘10찰’의 성립 시기는 대체로 802년(애장왕 3) 해인사가 창건된 이후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이 찬술된 904년 사이인 9세기 무렵이었다.
비슬산 옥천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창녕군의 화왕산 남쪽에 있었던 사찰, 또는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에 있는 용천사로 보기도 한다. 「일연 비문」에는 “포산 동쪽 기슭에 있는 용천사(涌泉寺)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로 개칭했다.”고 하였고,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밀양용천사(涌泉寺)”,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 불우조에는 “용천사(湧泉寺)가 비슬산에 있다.”고 하였다. 한자 표기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용천사일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김진규(金鎭圭)[1658~1716]의 『죽천집(竹泉集)』「비슬산 용천사 고적기(毘瑟山湧泉寺古蹟記)」에는 “의상이 창건할 때의 이름은 옥천(玉泉)이었고, 일연이 중수할 때의 이름은 용천(湧泉)인데, 불일(佛日)이라고 편액하였다.”고 전한다. 옥천사가 곧 용천사이며, 다시 불일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대구 읍지』 「불우」조에도 “용천사는 일명 옥천사”라고 하였다. 따라서, 의상의 화엄 십찰인 옥천사는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있는 용천사로 생각할 수도 있다. 비슬산은 해동 화엄 불교의 성지 중의 한 곳인 옥천사가 창건된 산악이었다. 의상의 화엄 사상은 신라 중대의 전제 왕권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고, 화엄 십찰은 중대 왕실과 밀접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비슬산은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면서, 신라 국가를 수호하는 산악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2.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聖師)가 성도하다.
현재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 아래에는 유가사의 소속 암자인 도성암(道成庵)이 자리하고 있다. 도성암은 선산의 도리사, 팔공산의 성전암과 함께 영남의 3대 수행 도량으로 손꼽힌다. 도성암은 신라 시대 비슬산에 은거한 관기와 도성 두 성사 중에서 도성이 머문 곳이었다.
『삼국유사』 피은 편의 「포산 이성」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신라 때 관기와 도성 두 성사가 있었는데, 어떤 내력의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함께 포산[나라 사람이 소슬산(所瑟山)이라고 하는 것은 범음(梵音)이다. 이는 포(包)를 말한다.]에 은거하였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도성은 북쪽 굴에 거처했는데 서로 십여 리쯤 떨어져 있었다. 이들은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늘 서로 따라 오가며 지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고 할 때면 산 속의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하여 굽으니 그 모양이 마치 영접하는 것 같았다. 관기는 이를 보고 도성에게로 갔다. 관기가 도성을 부르려고 할 때면 또 이와 같이 하여 나무들이 모두 북쪽으로 굽었고, 도성은 곧 관기에게 이르렀다. 이와 같이 여러 해를 지냈다. 도성은 처소 뒤 높은 바위 위에서 항상 좌선하더니 하루는 바위 틈새로부터 몸이 뚫고 나와 온 몸이 하늘에 올랐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혹은 수창군(壽昌郡)[지금의 수성군(壽城郡)이다]에 이르러 몸을 버렸다고 한다. 관기도 또 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두 성사의 이름으로 그 터를 명명하였는데, 그 터가 모두 남아 있다.[『삼국유사』 권5, 피은8, 「포산 이성」조]
관기와 도성은 신라 시대의 승려로 포산에 은거했지만, 활동 시기와 출신지 등 어떤 내력의 인물인지 알 수 없다. 관기는 ‘불도(佛道)의 기미를 엿보다’, 도성은 ‘도를 이루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설화적인 가공의 인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과 관련한 유적이 일연 당시에도 남아 있었다. 현재, 관기가 머물렀던 관기암은 비슬산 관기봉 남쪽에 암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관기봉은 천왕봉의 남쪽 4㎞밖에 돌출한 바위 봉우리이다. 도성이 머물렀던 도성암은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 아래에 있다. 도성암은 유가사의 소속 암자로 뒤편에 도성이 좌선하여 성도한 도통 바위가 있다. 또한 관기와 도성을 비롯한 아홉 성인의 유사(遺事)가 있었으나, 일연 당시에는 자세히 전하지 않았다. 관기와 도성은 관련 유적과 기록 등으로 보아 역사적인 인물로 파악된다.
관기와 도성은 대체로 신라혜공왕[재위 765∼779년] 때의 인물로 전해온다. 도성이 머물렀던 도성암에는 신라 하대에 조성한 삼층 석탑이 있다. 관기와 도성은 원래 현풍이 아니라, 신라의 왕경인 경주 사람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비슬산에 은거한 것은 신라 중대 말 하대 초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성은 처소 뒤의 높은 바위 위에서 좌선하다가 몸이 바위를 뚫고 나와 하늘로 올라가 간 곳을 몰랐는데, 혹은 수창군[현재의 대구광역시 수성구]에서 몸을 버렸다. 관기도 도성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관기와 도성 두 사람은 은거한 뒤에 수행을 통해 현신성불(現身成佛)한 것으로 보이며, 아미타 신앙의 소유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비슬산은 신라 시대 승려들이 세상을 피해 은둔해 정토를 염원하는 수도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처럼 신라 시대 비슬산은 의상의 화엄 십찰인 옥천사가 창건되고, 관기·도성이 어물던 관기암·도성암 등 정토 신앙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불교 사상적인 기반으로 신라 하대에는 많은 사찰이 속속 창건되었다. 헌덕왕 때의 대견사를 비롯해, 소재사, 유가사, 용연사 등의 사찰이 건립되면서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3. 고려 시대의 비슬산, 정토 신앙과 법화 신앙이 공존하면서 발전하다.
고려 태조왕건의 후삼국 통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중심은 한반도 중부 지방인 개경으로 옮겨졌다. 그 결과 신라 경주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불교계와 불교 사원 역시 새로운 재편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만, 비슬산은 다양한 신앙이 공존하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도성암(道成巖)은 높이가 두어 길이 되는데, 후세 사람이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태평 흥국 7년 임오[982년]에 성범(成梵)이 처음 이 절에 와서 살다가, 만일 미타 도량(萬日彌陀道場)을 열고 50여 년을 정성을 다하니, 자주 상서로운 조짐이 있었다. 이 때 현풍의 신사(信士) 20여 명이 매년 결사(結社)하고,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다. 매번 산에 들어가 향을 채취하여 쪼개고 씻어 발 위에 펼쳐 놓으니, 그 나무가 밤에 이르면 빛을 내어 촛불과 같았다. 이에 고을 사람이 향도(香徒)에게 크게 시주하고 ‘빛을 얻은 해’라고 경축하니, 이것은 두 성인의 신령이 감응한 바이거나, 혹은 산신에게 도움을 받은 바라고 하였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 천왕(靜聖天王)이다. … [중간 생략] … 지금 산 속에서 일찍이 아홉 성인의 유사(有事)를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은 상세하지 않다.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백암사(栢岩寺) 터가 있다],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 스님이다. … [중간 생략] … 반은 음이 ‘반’이고 우리말로 ‘피나무’이다. 첩은 음이 ‘첩’이고 우리말로 ‘갈나무’이다. 이 두 성사는 오랫동안 바위 덤불에 숨어 살면서 세상 사람과 사귀지 않았다. 모두 나뭇잎을 엮어서 옷 삼아 입고 추위와 더위를 다 지내고, 축축한 기운을 막고 숨길 데를 가릴 뿐이었으므로, ‘반’과 ‘첩’으로 이름을 불렀다.[『삼국유사』 권5, 피은8, 「포산 이성」조]
신라 시대 도성이 성도한 바위는 높이가 두어 길이 되었는데, 후세 사람이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현재, 천왕봉 아래에 있는 도성암이 그 절로 보인다. 이곳에 고려 전기인 982년(성종 1)에 성범(成梵)이 주석하면서 만일 미타 도량을 열고, 50여 년을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였다. 이때 현풍의 신도 20여 명이 결사하고 매년 향나무를 절에 바쳤는데, 채취한 향나무가 밤에 빛이 나는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이것을 관기와 도성 두 성인의 신령이 감응했거나, 산신인 정성 천왕의 도움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군의 사람들이 향도에게 크게 시주하였다. 향도란 불교적인 신앙 활동을 목적으로 모인 신도들의 조직으로, 신앙 결사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쓰인다. 성범이 개설한 ‘만일 미타 도량’은 관기와 도성의 정토 신앙을 계승하여, 현풍 지역과 비슬산 일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비슬산에서 활동한 관기와 도성, 성범을 비롯한 ‘포산 아홉 성인’의 자취가 기록되어 전해왔으나, 일연이 비슬산에 머물 때에는 자세하지 않았다. 다만, 반사와 첩사는 바위 덤불에 숨어 살면서 피나무와 갈나무 잎을 엮어 옷으로 삼아 입고 추위와 더위를 막고 몸을 가렸다고 한다. 또, 도의가 머물던 곳은 백암사였다. 도의는 가지산문의 개창조인 도의 선사와는 다른 승려이다. 금물녀는 이름에서 비구니이거나 여자 신도였을 것이다.
포산의 ‘아홉 성인’은 신라에서 고려 전기까지 비슬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승려들이며, ‘유사(遺事)’는 아홉 성인에 대한 남겨진 기록이었다. 관기와 도성 이후 비슬산은 서방 극락 세계인 아미타 정토에 뜻을 둔 사람들이 세상을 피해 은둔하면서 수행하는 정토 신앙의 성스러운 장소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뒤로 비슬산은 승려들의 수도처로서 명성이 높았다. 고려 후기에는 천태종 백련 결사(白蓮結社)의 2세 사주인 정명 국사 천인(靜明國師天因)[1205∼1248]이 비슬산에 은둔하면서 수행하였다. 국사의 이름은 천인(天因), 성은 박씨, 연산군(燕山郡) 사람이다. … [중간 생략] … 스승의 훈계에 따라 연경(蓮經)을 외우며, 비로소 보현 도량(普賢道場)을 열었다. 두 해가 지나자 지리산(智異山)으로 돌아가 은거하였고, 또 석장을 비슬산으로 옮겨 종적을 감춘 채 참됨을 닦고 여러 해 만에 돌아왔다. 후에 원묘 국사(圓妙國師)[了世]가 천태 교관을 전수하여 혜식(慧食)이 과연 발달하고 기변(機辨)이 바람처럼 일어났다.[『동문선(東文選)』 권83, 「만덕산 백련사 정명 국사 시집 서(萬德山白蓮社靜明國師詩集序)」]
정명 국사 천인은 비슬산에서 여러 해 동안 수행하였고, 원묘 국사 요세[1163∼1245]의 가르침을 받아 지혜가 발달하고 불법(佛法)의 기미를 변별하는 것이 바람처럼 일어났다. 비슬산이 승려들의 수도처로서 양호한 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천인이 비슬산에서 수도하던 시기는 대략 1230년대 중반이었다. 이로 보아 비슬산에서 천태종의 법화 신앙(法華信仰)도 활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이첨(李詹)[1345∼1405]은 「보당암 중창 법화 삼매 참소(寶幢庵重創法華三昧懺疏)」라는 글을 지었다. 비슬산의 보당암에서 『법화경(法華經)』에 의거한 법화 예참(法華禮懺)을 설행하여 백련결사의 법화 신앙을 계승한 것이었다.
한편, 1040년(정종 6) 최승로(崔承老)의 손자인 최제안(崔齊顔)이 경주의 고위산에 천룡사(天龍寺)를 중창하고 남긴 글에 ‘비슬산 도선사(道仙寺)’가 등장한다. 도선사는 최제안과 같은 고위층의 문벌 귀족이 20결의 토지를 희사하여 운영한 원당(願堂)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 비슬산에는 의상의 화엄 사상, 관기와 도성을 계승한 미타 정토 신앙, 천태종의 법화 신앙이 융성했다. 거기에 문벌 귀족이 운영하는 원당도 있었다. 다양한 불교 신앙이 성행하였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연이 주석하면서 『삼국유사』 찬술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연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약 37년간 비슬산에 주석하였다. 즉, 1227년[22세] 무렵부터 1249년[44세]까지 23년간 보당암(寶幢庵), 무주암(無住庵), 묘문암(妙門庵) 등의 암자에 머물렀다. 이것을 흔히 ‘제1차 포산 시절’로 파악한다. 그리고 1264년[59세]부터 1277년[72세]까지 14년을 인흥사(仁興社)와 불일사(佛日社) 등에 주석하였는데, 이때가 ‘제2차 포산 시절’이다. 일연의 비슬산 주석에 대해서는 「보각 국사 비명」에 자세하게 전해온다. 「보각 국사 비명」은 고려 후기의 문인인 민지(閔漬)[1248∼1236]가 지었으며, 1295년 8월에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북리의 인각사(麟角寺)에 세워졌다.
흥정 기묘(興定己卯)[1219년]에 진전사(陳田寺)의 장로 대웅(大雄)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득도한 다음 구족계를 받았다. 이에 선방을 두루 다니면서 참선하여, 명성이 매우 높았다. 당시에 무리들이 받들어 구산 중의 사선(四選)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정해년[1227, 고종 14] 겨울에 선불장에서 상상과에 합격하였다. 그 뒤에 포산의 보당암(寶幢庵)에 주석하면서 마음을 선관에 두었다. 병신년[1236, 고종 23] 가을에 병란(兵亂)이 있어서 스님께서 다른 곳으로 난리를 피하고자 하였다. 이런 연유로 문수 오자주(文殊五字呪)를 외워서 감응하기를 바랐더니, 갑자기 벽에서 문수보살이 몸을 나타내어 말하기를 “무주(無住) 북쪽에 있으라.”고 계시하였다. 명년[1237년] 여름에 다시 이 산의 묘문암(妙門菴)에서 거처하게 되었는데, 암자의 북쪽에 난야가 있어 그 이름을 무주암(無住庵)라고 하였다. 스님께서 이에 지난번의 계시를 깨닫고 이 암자에 머물렀다. 당시 항상 “중생의 세계는 줄지 않고 부처의 세계는 불어나지 않는다[生界不減 佛界不增]”는 말[화두]로 참구하였는데, 갑자기 어느 날 활연하게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오늘에야 비로소 삼계가 허황한 꿈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실낱과 털끝만큼도 거리낌이 없음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 해에 삼중대사의 법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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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원년(至元元年)[1264년] 가을에 이르러 여러 번 요청하여 남쪽으로 돌아와 오어사(吾魚社)에 머물렀다. 얼마 있지 않아 인홍사(仁弘社) 주지 만회(萬恢)가 스님에게 주지의 자리를 사양하니 학식 있는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무진년[1268년] 여름에 조정의 명이 있어 선종과 교종의 명망이 높은 스님 100명을 모아, 운해사(雲海寺)에서 대장경 낙성회를 열고, 스님을 청하여 법회를 주관하게 했다. 낮에는 불경을 읽고, 밤에는 불교 교의의 진체를 담론하였다. 여러 대가들의 의심하는 바를 스님께서 모두 쪼개어 풀이하기를 물 흐르듯이 하여, 사리에 정통함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에 감복하여 강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스님께서 인홍사에 주석한지 11년 만에[1275년], 이 절을 지은 지 이미 오래되어 법당이 다 무너지고 또 지대가 낮고 좁아서 스님께서 중건하여 새로 넓게 지었다. 이에 조정에 아뢰어 졸 이름을 바꾸어 인흥사(仁興社)로 부르니, 임금이 제액을 써서 하사하였다. 또 포산의 동쪽 기슭에 용천사(涌泉寺)를 다시 수리하여 불일사(佛日社)라 하였다. 임금[충렬왕]께서 즉위한 지 4년인 정축년[1277년]에 조칙을 내려 운문사(雲門寺)에 주석하게 하니, 불교의 현풍을 크게 드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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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년[1281년] 여름에 동정(東征)으로 인하여 임금께서 동도(東都)에 행차하여 조서를 내려 스님을 행재소(行在所)에 오게 하였다. 도착하자 소를 지어 자리에 오를 것을 청하니, 공경하는 마음이 갑절로 생겼다. 이때 스님의 불일 결사문(佛日結社文)을 취하여 그 제액을 써서 불일사에 보관하도록 하였다.[민지, 「보각 국사 비명(普覺國師碑銘)」]
일연은 속세의 성은 김씨이며 장산군(章山郡)[현재의 경산시] 사람으로, 선종 가지산문에 속한 승려였다. 1219년(고종 6)에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선방을 두루 다니면서 참선하여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승과에 장원 급제한 뒤 1227년(고종 14)에 비슬산[포산]의 보당암에 주석하였다. 비슬산은 일연의 고향인 장산군과 지근거리에 위치한다. 9살 때 출가하여 고향을 떠났다가, 22세에 승과에 급제한 후 보당암에 주석했으니, 금의환향한 셈이다.
일연은 1236년(고종 23) 가을에 몽고 침략의 여파가 미치자 난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문수 오자주(文殊五字呪)’를 외워 감응을 기다렸다. 갑자기 벽에서 문수보살이 나타나 “무주의 북쪽에 있으라.”고 계시했다. 그리고 1237년(고종 24)에 보당암을 떠나 묘문암에 머물다가, 북쪽의 무주암으로 옮겼다. ‘문수 오자주’는 『금강정경 유가문수사리보살 공양 의궤(金剛頂經 瑜伽文殊師利菩薩供養儀軌)』의 주문인 ‘아라파차나(阿羅婆遮那)’이다. 『금강정경(金剛頂經)』은 밀교계의 경전으로, 보당암은 밀교적인 다리니 신앙의 사상 경향이 있었다. 아울러, 일연의 주문에 감응하여 문수보살이 나타났으므로 문수 신앙과도 연계되었다.
일연은 보당암에서 “마음을 선관에 두었다[心存禪觀]”하여, 선승으로서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했다. 무주암에서는 “중생의 세계는 줄지 않고 부처의 세계는 불어나지 않는다[生界不減 佛界不增]”를 화두로 참구하여 활연하게 깨달음을 얻었다. 간화선을 수행하여 활연대오(豁然大悟)했던 것이다.
일연은 비슬산에서 선승으로서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였고,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일연에게 ‘제1차 포산 시절’은 선종 승려로서 수행을 시작해 득도했던 시기였다. 비슬산은 일연이 처음으로 주석한 초임처(初任處)이자, 수행을 시작한 수도처(修道處), 깨달음을 얻은 오도처(悟道處)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일연은 1249년(고종 36) 정안(鄭晏)[?∼1251]의 초빙으로 비슬산을 떠나 남해 정림사(定林寺)에 주석해, 대장경 판각 사업에 참여하였다. 정안이 죽고 난 뒤에는 길상암(吉祥庵)에서 1260년(원종 1) 『중편 조동 오위(重編曹洞五位)』를 간행하였다. 1261년(원종 2)에는 왕명으로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주석하였고, 멀리 보조 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1158∼1210]의 법통을 계승했음을 천명하였다.
1264년(원종 5)에 잠시 포항의 오어사(吾魚社)에 머물다가, 당시 주지였던 만회(萬恢)의 초빙으로 다시 비슬산의 인홍사(仁弘社)에 주석하였다. 인홍사는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던 절로, 현재 남평 문씨의 세거지로 유명하다. 일연은 인홍사에서 1264년에서 1275년(충렬왕 1)까지 대략 11년간 머물렀다. 이때 배움을 청하는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1268년(원종 9)에는 운해사(雲海寺)에서 대장경 낙성회를 열고 법회를 주관하였다. 1275년에는 인홍사를 중건하고 절의 이름도 인흥사(仁興社)로 바꾸는 등 사세를 크게 일으켰다. 이때 충렬왕은 금으로 쓴 어필 제액을 내려 사액 서원으로 삼았다.
또, 1275년에는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涌泉寺)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로 이름을 바꾸었다. 용천사는 의상의 화엄 십찰로 유명한 옥천사로 추정된다. 일연은 불일사에서 「불일 결사문(佛日結社文)」을 반포하고, 신앙 결사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277년(충렬왕 3) 운문사로 옮겨 주석하면서, 비슬산을 떠나게 된다. 1281년(충렬왕 7)에는 충렬왕이 동정군(東征軍)을 전송하러 경주에 행차하였을 때, 일연을 행재소로 초청하여 법문을 들었다. 이때 충렬왕이 「불일 결사문」을 취하여, 친히 제액을 쓰고 서명 압인하여 불일사에 들이도록 하였다. 일연은 불일 결사의 지향점을 법문에 담아 설법하였고, 그것에 감동한 충렬왕이 불일사를 사액했던 것이다.
「보각 국사 비명」에는 ‘2차 포산 시절’ 일연이 인흥사를 중건하고, 불일사에서 불일 결사를 전개한 사실만 전한다. 그런데, ‘지원 십오년 인흥사 개판(至元十五年仁興社改板)’이라는 간기가 있는 『역대 연표(歷代年表)』의 판목이 해인사의 사간판(寺刊板)으로 전해오고 있다. 일연은 1278년(충렬왕 4)에 인흥사에서 『삼국유사』 찬술의 기초가 되는 연표를 출판했던 것이다. 일연은 비록 1277년부터 운문사에 머물렀지만, 『역대 연표』에 대한 자료 수집과 교감은 인흥사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1275년에 선린(禪鄰)이 간행한 『법화경 보문품(法華經普門品)』, 1290년 포산의 선린이 발문을 쓴 『인천 보감(人天寶鑑)』, 1293년(충렬왕 19)에 인흥사에서 개판한 『대비심 다라니경(大悲心陀羅尼經)』등도 출판했다. 포산[비슬산]의 선린은 일연의 대표적인 문도로, 「보각 국사 비명」 음기에 수록된 ‘인흥사 선린(仁興社禪麟)’이었다. 포산은 곧 비슬산 인흥사였을 것이다. 일연은 인흥사에서 『삼국유사』의 기초가 된 『역대 연표』를 비롯해 다수의 불교 전적을 출판하였다. 이 출판물들은 법화 신앙과 관음 신앙, 밀교적인 다라니 신앙과 관련이 있고, 다분히 현세 이익적 또는 현실 구원적, 실천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이는 농민·천민층으로 하여금 현실적 차원에서 구원과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한 신앙적 노력으로 실천적·현세 구원적 성격을 띤 불교 운동을 표방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일연은 용천사를 중수해 불일사로 개명하고, 「불일 결사문」을 반포해 불일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쉽게도 「불일 결사문」이 전하지 않아, 일연이 표방한 사상적 지향점은 알 수 없다. 다만, 불일 결사는 보조 국사 지눌이 1190년(명종 20)에 팔공산거조사(居祖寺)에서 「권수 정혜 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반포하고 정혜 결사[수선사]를 결성한 것과 비슷해 보인다. 「보각 국사 비명」에서 일연이 “멀리 지눌의 법통을 이었다.”고 하여, 불일 결사가 정혜 결사의 정신을 계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일 결사는 정혜 결사와 마찬가지로 기존 불교계의 타락상과 모순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불교계의 개혁과 대중화 운동의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일연의 ‘1차 포산 시절’은 선승으로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여 깨달음을 얻은 시기였다. ‘2차 포산 시절’은 인흥사에서 『역대 연표』를 비롯한 각종 불교 전적을 출판하면서 『삼국유사』 찬술의 토대를 다지고, 불일사에서 불일 결사를 통해 불교 대중화 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점에서 비슬산은 일연이 가장 오랜 기간 머문 곳이라는 점과 함께 그의 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숙성한 곳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5. 일연, 비슬산에서 『삼국유사』 찬술의 토대를 마련하다.
일연은 1277년 비슬산을 떠나 운문사에 주석하였고, 1281년에 경주의 행재소에서 법문을 설하였다. 1282년(충렬왕 8) 내전에 맞이하고, 개경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도록 하였으며, 1283년 국존으로 책봉되었다. 1284년 인각사(麟角寺)를 하산소로 하여 두 차례에 걸쳐 구산문 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으며, 1289년(충열왕 15) 7월 입적하였다. 일연은 비슬산을 떠난 뒤 13년을 운문사, 광명사, 인각사 등에 주석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세속 나이는 84세이며, 승려 나이는 71세였다.
「보각 국사 비명」에는 일연의 저서로 『어록』 2권, 『게송 잡저』 3권이 있고, 편수한 것으로 『중편 조동 오위』 2권, 『조파도』 2권, 『대장수지록』 2권, 『제승법수』 7권, 『조정사원』 30권, 『선문염송사원』 30권 등 100여 권이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삼국유사』의 이름이나, 찬술 시기 등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삼국유사』의 찬술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어 있다. 일연이 국존으로 책봉되어 하산소로 삼았던 군위의 인각사라거나, 비슬산을 떠나 주석하였던 청도의 운문사라고 한다. 최근에는 그가 37년간 활동한 비슬산이 『삼국유사』의 찬술처라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 중에서 1278년 인흥사에서 『역대 연표』가 간행된 이후 1283년 국존으로 책봉되던 운문사 주석 시기에 『삼국유사』가 본격적으로 찬술되었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해 37년간 생활한 비슬산에서 불교의 많은 저술을 하면서 불교를 널리 유통하기 위해 『삼국유사』의 저술이 이루어졌다는 반론도 있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 「포산 이성」조의 말미에 “내가 일찍이 포산(包山)에 우거할 때 두 승려가 남긴 미덕을 기록한 것이 있어, 이제 그것을 아울러 수록한다[予嘗寓包山 有記二師之遺美 今幷錄之]”고 하였다. 또, 일연은 “지금 비슬산 중에는 일찍이 [관기와 도성을 비롯한] 9명의 성사(聖師)에 대한 유사(遺事)의 기록이 있었으나 상세하지 않다[今山中嘗記九聖遺事 則未詳]”고 하였다. 일연은 비슬산에 있을 때 관기와 도성에 대한 기록을 수집할 수 있었고, 그것을 『삼국유사』를 찬술할 때 「포산 이성」조의 편목으로 포함시켰던 것이다. 더불어 포산의 9성에 대한 남겨진 이야기도 접하였으나, 상세하지 않아 구체적인 항목으로 수록할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해당 편목을 집필한 장소를 직접 기록한 것은 「포산 이성」조가 유일하다.
「포산 이성」조의 원천 자료를 수집한 시기는 일연의 1차 포산 시절로 『삼국유사』 집필의 시작처는 보당암을 중심한 포산에서 이루어졌다거나, 제2차 포산 시절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고도 한다. 「포산 이성」조에서 ‘내가 일찍이 포산에 우거할 때’라는 구절의 ‘일찍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1차 포산 시절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일연은 보당암 등에서 주석하던 제1차 포산 시절에 「포산 이성」의 설화와 ‘포산 구성’의 기록들을 접하였고, 이때가 『삼국유사』 찬술을 구상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몇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편찬할 수 없는 방대한 자료를 담고 있다. 원천 자료 수집에 많은 기간이 소요되었을 것이고, 윤문과 수정에도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일연은 1차 포산 시절부터 『삼국유사』 찬술을 염두에 두고 그에 필요한 기초 자료들을 수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편목이 관기와 도성의 이야기를 담은 「포산 이성」조였다. 그리고 2차 포산 시절 인흥사에서 『삼국유사』 연표의 기초가 된 『역대 연표』를 정리 간행하였다. 그렇다면, 『삼국유사』는 일연이 비슬산에 머물면서 내용을 구상하여 기초를 다졌고, 운문사나 인각사 등에서 교감하여 최종적으로 출판했을 것이다. 비슬산은 『삼국유사』의 저술이 이루어진 찬술처라 할 수 있겠다.
6. 비슬산, 숭유 억불 시대에도 높은 불교적 위상을 지녔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유교 국가를 표방하면서 억불 숭유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사원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와 노비는 유교적인 시설 내지 사족의 경제적 기반으로 바뀌어 나갔다. 조선 시대의 융성한 유교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전 시기의 불교문화가 그 기반이 되었다. 조선 시대 비슬산의 불교문화도 전반적으로 그 영향력이 감소되어 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산으로 숭앙되어 온 비슬산의 불교 사상적인 전통은 면면히 유지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비슬산 정상부에 위치하던 보당암의 중수였다. 보당암은 고려 후기 일연이 머물렀던 사찰이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의미를 따라 수칸의 절을 중창해 일신하고, 공덕을 헤아리기 어렵다기에 7축 『법화경』을 예참합니다. 감히 이 훌륭한 법식의 이익에 의지하여, 임금님의 수명이 더욱 길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제자는 장부의 몸을 받아 태어났기에 마음으로 보살도를 행하고자 하나, 아직 번뇌에 얽매여서 항상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골몰하였으니, 미약하나마 이제까지 저축하였던 재산을 정성껏 보시하고 희사하고자 합니다. 큰 산인 비슬산의 정상에 암자가 하나 있으니, 그 이름이 보당(寶幢)입니다. 그 터는 남아 있으나 그 밖의 전각이나 건물 등의 시설은 와해되어 바람과 비에 쓸려 나부낀 지 밤이 가고 아침이 온 지 여러 날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이에 여러 도반들과 함께 맹세하여, 비로소 경영하는 수고를 꺼리지 않고, 마침내 원만하게 성취하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동량은 옛날처럼 빛이 나고, 단청은 새롭게 찬란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사를 마치게 됨에,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소원을 풀고자 하여, 7편의 법식을 설하고 낙성의 법식을 행하며, 일대의 종사를 모셔 참선하는 법회를 주관토록 하였습니다. 오묘하게 장엄한 보찰이요 불가사의한 위음이며, 급고독원(給孤獨園)의 정사를 이곳에 옮겨 놓은 듯하니, 어찌 영취산(靈鷲山)의 법회가 멀리 있겠습니까. 참된 공을 맺으니, 부처님께서 두루 감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남면하고 옷을 드리우신 분[임금님]께서는 억만 년 동안 길이 아름다우시며, 동궁께서는 나라를 잘 보살펴 임금의 복이 강녕하게 얻어지기를 바랍니다.[『동문선』 권111, 「보당암 중창 법화 삼매 참소(寶幢庵重創法華三昧懺疏)」]
이첨(李詹)[1345∼1405]은 비슬산 정상의 보당암을 중창하고 7권의 『법화경』에 의거한 예참을 설행하였다. 중창 연대는 조선 초기인 1402년(태종 2)로 파악된다. 비슬산을 ‘대산(大山)’이라고 하였고, 그 정상의 암자가 보당암이었다. 비슬산의 정상에 위치한 사찰은 대견사가 유일무이하므로, ‘보당암’은 곧 ‘대견사(大見寺)’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한다. 대견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용리 산1번지, 비슬산 대견봉의 정상부에 위치한 사찰이다.
이첨은 사찰의 중창과 『법화경』 예참의 공덕이 크므로, 그것에 의지해 국왕의 수명을 축원하고,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공역을 마친 후에는 낙성식을 개최하고 일대의 종사를 모시고 참선 법회를 주관케 했다. 그 공덕으로 국왕은 억만 년 동안 아름답고, 동궁은 나라를 잘 살피고 무한한 수복을 얻기를 기원하였다. 이첨이 행한 불교 의식은 『법화경』에 의거한 법화 예참이었다. 조선 초기 비슬산의 보당암은 고려 후기에 유행했던 천태종 백련 결사(白蓮結社)의 법화 신앙을 계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비슬산의 사찰로 대견사가 『태종실록(太宗實錄)』과 『세종실록』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조선 시대까지 국가에서 편찬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된 사례여서 주목된다.
① 태종 16년 2월. 임진일에 경상도 현풍현대견사의 관음(觀音)이 땀을 흘렸다.
② 세종 5년 11월. 병오일에 경상도 현풍현 비슬산대견사의 석상 장육관음(石像丈六觀音)이 땀이 흘렸다.
대견사는 1416년(태종 16) 2월 29일과 1423년(세종 5) 11월 29일에 각각 수록되었다. 경상도 현풍현 비슬산대견사의 석상인 장육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는 것이다. 태종과 세종 때에는 불교 종파와 사원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단행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는 점과 그것이 중앙에 보고되어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점이 주목된다. 불상이 땀을 흘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일어날 변고를 미리 알리는 예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 그것이 실록에 기록된 것은 조선 초기 대견사가 국가와 왕실의 관심을 받는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1469년(예종 1)에 편찬된 『경상도 속찬 지리지』에서 ‘유가사(瑜伽寺), 대견사, 소재사(消災寺), 도성사(道成寺), 정백사(庭栢寺), 속성사(速成寺)’ 등 비슬산에 위치한 6개의 사찰이 모두 ‘교종(敎宗)’에 속한다고 기록되었다. 1424년(세종 6)에 사찰의 소속 종파를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합하였는데, 비슬산의 사찰은 모두 교종에 소속되었다.
1481년(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특히 1530년(중종 25)에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현풍현 불우조에 비슬산의 사찰로, 대견사를 비롯해 소재사·도성사·속성사·정백사 등 5개의 사찰이 수록되었다. 유가사는 고적조에 실려 있다. 특히, 대견사는 “비슬산 남쪽 정상부에 있으며, 신라헌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위치와 창건 시기를 특기해 두었다. 그 외에 밀양도호부의 용천사(湧泉寺), 성주목의 인흥사(仁興寺)와 용연사(龍淵寺), 창녕현의 연화사(蓮花寺) 등도 비슬산의 사찰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수의 사찰이 수록된 것은 조선 시대에도 비슬산의 불교문화적 위상이 높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7. 비슬산용연사(龍淵寺)에 석가세존의 진신 사리가 모셔지다
비슬산에는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에 들어와 불교 신앙적인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불사(佛事)가 이루어진다.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한 ‘석가여래 부도탑’이 1673년(현종 14)에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석가여래 부도탑은 현재 보물 제539호로 지정된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達城龍淵寺金剛戒壇)’이다. 용연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반송리 915번지, 비슬산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용연사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절 근처 골짜기에 신룡(神龍)이 사는 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용연사 근처에는 용이 나타났다는 전설을 가진 용주 폭포가 있다. 용연사는 신라 말 보양(寶壤) 선사가 912년(신덕왕 즉위년)에 처음 창건했다고 한다. 보양은 신라 말 고려 초에 고려태조의 지원으로 청도의 운문사를 창건한 선종 승려였다. 극락전 앞의 용연사 삼층 석탑[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8호]은 고려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양선사의 용연사 창건을 뒷받침한다. 고려 시대 용연사의 역사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가정(嘉靖) 연간[1522∼1566]에 해운당 천일(海雲堂天日)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모두 불타버렸다. 사명 대사(四溟大師)[1544∼1610]가 1603년(선조 36) 탄옥(坦玉), 인잠(印岑), 경천(敬天) 등에게 명하여 중창하도록 했다. 이때 지은 전각이 대웅전 등 5개소였고, 20여 명의 승려가 거주하였다. 그렇지만, 1650년(효종 1)에 화재로 전각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이에 홍묵(弘默), 묵철(默哲), 조우(照雨) 등을 중심으로 1653(효종 4)부터 1661년(현종 2)까지 대웅전을 비롯한 2백 수십 칸의 대중창을 이루었다.
대찰로서의 면모를 일신한 용연사는 불교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불보인 석가여래 부도탑을 경내에 모시게 되었다. 흔히 보궁(寶宮)으로 불리는 석가여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탑을 1673년에 건립했던 것이다. 그 건립 과정에 대해서는 사헌부 지평인 남곡(南谷) 권해(權瑎)[1639∼1704]가 1676년(숙종 2)에 쓴 「사바 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명 병서(娑婆敎主釋迦如來浮圖碑銘幷序)」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이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모셔와 양주[현재의 양산]의 통도사(通度寺)에 봉안하였는데, 2개의 함(函)에 각각 2과씩이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이 탑을 파헤치고 사리를 꺼냈는데, 송운 대사 유정[사명 대사]이 격문을 써서 화복(禍福)으로 꾸짖으니 왜적이 두려워하여 완전하게 해 놓고 돌아갔다. 송운 대사가 사리를 받들어 금강산으로 가서 서산 대사 휴정(休靜)[1520∼1604]에게 물으니, 휴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자장은 신인(神人)이다. 그것을 처음 봉안할 때에는 닫혀 있었는데 끝내는 꺼냄을 면하지 못하였다. 대개 자장의 것은 나에게 있지만,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한 함은 문인 선화(禪和) 등에게 주어 태백산보현사(普賢寺)에 봉안하게 했다. 또 한 함은 송운 대사에게 주어 통도사로 돌아가 탑을 보수하여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대개 그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었다. 이때는 영남에 새롭게 들불이 일어나 모두 새나 쥐들이 쪼고 쓰는 바가 되어 공사를 일으킬 틈이 없었다. 그리고 송운 대사가 어명으로 일본으로 갈 일이 생겨 원불(願佛)을 받들어 돌아가게 되자, 송운 대사는 그 함을 치악산(雉岳山) 각림사(覺林寺)에 두도록 했다. 그런데 문도인 청진(淸振)이 비슬산용연사에 옮겨와 봉안하니 후에 대중들이 서로 의논하여 탑을 만들어 안장하기로 했다. 또, 서산과 사명 두 대사의 남긴 뜻을 받들어 1과를 받들어 통도사에 돌아가 봉안하고 1과는 남겨 용연사 북쪽 기슭에 봉안하도록 했다. 계축[1673년] 5월 5일에 탑을 이루었으며, 높이가 5척 5촌이었다.
절의 승려인 광헌, 관륜 등이 북으로 7백여 리를 달려와 서울에 이르러 나를 찾아와 일의 시말을 말하고 비명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공자님의 글을 읽어 불교의 말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어찌 불교의 사적을 알겠는가. 하지만, 석가여래를 묻은 지 1,600여 년이 되었으며, 그 사리가 중국을 거쳐 5만 리를 지나 동방에 와서 통도사에 봉안된 지 940여 년이 되었다. 왜적이 이미 꺼낸 것을 되돌려 받은 지 80여 년이 지나 통도사 옛 탑과 비슬산용연사에 나누어 비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대의 말을 믿는다면 또한 신령하여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말에 따라 차례로 서술하였다. 또 명을 지어 이르기를 “비슬산은 울창하고 낙동강은 양양한데, 탑이 우뚝 솟았으니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였네.”[「사바 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명 병서」]
자장 율사는 중국에서 4과의 진신 사리를 모셔와 두 함에 나누어 통도사의 사리탑에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통도사의 사리탑을 왜적이 파헤치자 사명 대사가 사리함을 금강산으로 가져가 서산 대사와 상의하였다. 서산 대사는 통도사에 다시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한 함은 태백산보현사(普賢寺), 나머지 한 함은 통도사로 모시게 했다. 당시 영남 지역에서는 일본의 침략으로 공역을 일으킬 형편이 되지 않았고, 사명 대사는 포로 송환 교섭을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되어, 사리함을 치악산의 각림사(覺林寺)에 모시도록 했다. 이때 문인인 청진이 비슬산용연사로 모셔와 대중들과 상의해 탑을 세워 봉안키로 하였다. 그리고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의 뜻을 받들어 2과의 사리 중 통도사에 1과를 보내고 나머지 1과를 용연사에 모셨다. 1673년에 일을 마치니 탑의 높이가 5척 5촌이었다. 왜적이 통도사의 사리탑을 파헤친 지 80여 년 후의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용연사는 자장이 통도사에 모신 석가모니 진신 사리 1과를 봉안하게 되었다.
용연사 금강계단은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금산사 세존 사리탑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계단형 사리탑이다.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듬직한 정사각형의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얇은 원형 괴임돌을 두 개 포개고 나서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양식적으로 여주신륵사(神勒寺)에 있는 보제존자 사리탑의 형태를 모방해 석종형으로 하였다. 이후 통도사 금강계단이나 금산사 세존 사리탑도 이 형식을 계승하여, 용연사 금강계단은 석종형 세존 진신 사리탑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용연사에서 자장 율사가 통도사에 모신 석가모니 진신 사리를 봉안하게 됨으로써, 비슬산은 우리나라 불사리 신앙의 중심지로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8. 사찰로 본 비슬산 불교의 전개 양상
비슬산의 불교 문화적인 전개 양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불교 사찰의 건립과 승려들의 활동, 신앙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삼국유사』를 비롯해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문인들의 문집류, 읍지류 등의 문헌 자료와 금석문에 기록된 비슬산의 사찰을 검토한다. 아울러, 비슬산의 사찰에서 전해오고 있는 불교 유산도 참조하였다.
조선 초기에 작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산천조에는 “비슬산이 현풍현을 비롯해, 성주목·밀양도호부·창녕현 등에 분포한다. 현풍현의 동쪽 5리, 밀양도호부는 풍각현(豊角縣)[현재 청도군 풍각면] 서북 30리, 성주목에서는 화원현(花園縣) 남쪽 10리, 창녕현에서는 북쪽 30리에 위치한다”고 했다. 비슬산은 현풍이 가장 가까우며, 현풍현의 진산(鎭山)으로, 가장 많은 사찰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먼저, 『삼국유사』에는 비슬산의 사찰로 옥천사, 관기암, 도성암, 백암사, 도선사 등이 확인된다. 옥천사는 의상의 화엄 십찰의 하나였으며, 최치원의 『법장 화상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관기암과 도성암은 신라 시대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승려가 은거하여 득도했던 암자였다. 그 뒤에 도성사에는 고려성종 때에 성범이 주석하면서 만일 미타 도량을 열어 상스러운 조짐이 있었다. 백암사는 도의가 머물렀던 사찰이었다. 포산 구성(九聖) 중에서 반사와 첩사가 은거한 암자도 있었다. 포산 구성은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사 등이었다. 그 중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 성범 등이 은거·수도했던 사찰이나 암자가 확인된다. 그 외에 자양이나 금물녀, 백우사가 머물던 사찰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도선사는 고려의 문벌 귀족이 20결의 토지를 희사해 운영한 원당이었다.
다음으로 일연의 비문인 「보각 국사 비명」과 음기에도 비슬산의 사찰로, 보당암, 묘문암, 무주암, 인흥사, 불일사 등 다수가 전한다. 일연이 승과에 급제하고 처음 머문 곳이 비슬산 정상부의 보당암이며, 그 뒤에 묘문암과 무주암에서 수도했다. 그리고 인홍사에 11년을 주석하면서 크게 중수하여 인흥사로 사액을 받았고, 비슬산 동쪽의 용천사를 중수하여 불일사로 고치고 불일 결사를 일으켰다. 「보각 국사 비명」 음기에는 문도로 대선사인 인흥사의 선린, 선사인 불일사의 영숙(英淑)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보당암은 비슬산의 정상에 위치했는데, 조선 초기[1402년]에 이첨이 중수하고 낙성식에서 『법화경』에 의거한 법화 예참을 설행하였다. 현재, 비슬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사찰로는 대견사가 유일하므로, 보당암이 곧 대견사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인흥사는 일연과 그의 제자들이 『역대 연표』[1278년]를 비롯해, 『법화경 보문품』[1275년], 『인천 보감』[1290년], 『대비심 다라니경』[1293년] 등 다수의 불교 전적을 출판했다.
『경상도 속찬 지리지』[1469년]에 의하면 ‘유가사(瑜伽寺), 대견사, 소재사(消災寺), 도성사(道成寺), 정백사(庭栢寺), 속성사(速成寺)’ 등 비슬산에 있던 6개의 사찰이 모두 ‘교종’에 속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비슬산의 사찰이 가장 종합적이고 풍부하게 정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전기에 간행되었으며, 신라·고려 시대의 상황을 전적으로 반영하지 못한다. 따라서 신라·고려 시대의 문집이나 금석문, 『조선왕조실록』, 조선 후기에 편찬한 각종 읍지류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현풍현, 밀양도호부, 성주목, 창녕현의 불우조나 고적조에 실린 비슬산의 사찰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① 현풍현 불우조: 대견사(大見寺)는 비슬산의 남쪽 정상[南角]에 신라헌덕왕이 창건하였다. 소재사(消災寺)·도성사(道成寺)·속성사(速成寺)·정백사(庭栢寺)는 모두 비슬산에 있다.
고적조 : 유가사(瑜伽寺)비슬산 아래에 있다.
김지대(金之岱)[1190∼1266]의 시 소개[『신증동국여지승람』 권27, 현풍현]
② 성주목 불우조: 인흥사(仁興寺)는 비슬산(琵瑟山) 북쪽에 있는데, 고려공민왕이 제액의 글자를 썼다.
이숭인(李崇仁)[1347∼1392]의 인흥사 시 소개. 용연사(龍淵寺)는 비슬산의 북쪽에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8, 성주목]
③ 밀양도호부 불우조: 용천사(湧泉寺)는 비슬산(琵瑟山)에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6, 밀양도호부]
④ 창녕현 불우조: 연화사(蓮花寺)는 비슬산(琵瑟山)에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7, 창녕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비슬산의 사찰은 대견사·소재사·도성사·속성사·정백사·유가사·인흥사·용연사·용천사·연화사 등 모두 10개소이다. 그 중 대견사는 비슬산 남쪽 정상에 있으며, 신라헌덕왕 때 창건했다고 기록되었다. 조선 초기 비슬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천조에는 이숭인(李崇仁)이 비슬산 승사(僧舍)에서 지은 시가 있으나, 어느 사찰인지 알 수 없다.
대견사는 신라헌덕왕[재위 809∼826] 때 창건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1871년에 편찬한 『현풍현 읍지』 불우조에 “대견사는 신라헌덕왕이 창건했으며, 9층 석탑이 있다. 만력 임진년[1592년]에 절의 전각이 기울고 무너졌다. 상량문 1책을 얻었는데 ‘산세가 대마도(對馬島)를 끌어당기는 형세이므로 이 절을 창건해 진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초유사로 있을 때 이 책을 얻어 보았으나, 그 후에 잃어 버렸다.”고 한다. 대견사에 9층 석탑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삼층 석탑[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42호]이 전해온다.
상량문에는 대견사의 창건 시기도 수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견사를 창건함으로써 왜를 상징하는 대마도를 진압했다는 구절은 흥미를 끈다. 대견사는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돌로 만든 관음보살상이 땀을 흘렸다고 한다. 최근에는 일연이 머문 보당암이 조선 초기에 이첨이 중수한 이후 대견사로 개명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대견사는 신라헌덕왕 때 창건되어, 고려 시대에 일연이 머물면서 문수 신앙과 밀교의 다리니 신앙, 조선 초기에 법화 신앙과 관음 신앙 도량으로 신앙의 폭이 확대되었다.
소재사는 이름에서 소재 도량(消災道場)을 개설한 사찰로 짐작된다. 소재 도량은 천재지변과 외침을 방지하고, 임금의 장수와 왕실의 무궁함을 기원하면서 임금의 정신적 위안을 도모하는 법회였다. 고려의 도량 의례 중에서는 소재 도량의 개최 빈도가 제일 높았다. 소재사에는 신라헌덕왕 왕비가 시주해 만든 은입사 향완이 있었는데, 글씨가 매우 정교했다고 한다.
① 소재사에는 석조(石槽)가 있다. 또 향로가 있는데, 이은으로 쓴 글에는 ‘신라헌덕왕비가 희사·시주해 주성’했다.’고 적혀 있다. 은으로 된 전각 글씨의 자획이 매우 정교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용연사 승려가 가져간 것을 다시 본사로 찾아 왔는데, 지금 또 잃어버려 되돌려 받았다.[『현풍현 읍지』 불우조]
② 지정(至正) 18년[1358년] 6월 일에 비슬산소재사(消災社)의 지장보살 앞에 바치는 향완이다. 주상 전하의 만만세, 공주 전하의 수천추, 왕후 전하의 수무강과 천하가 태평하기를 기원한다. 대공덕주는 묘해(妙海), 화주는 달해(達海)이다.[「소재사 향완」]
헌덕왕비는 귀승부인(貴昇夫人)으로 각간 예영(禮英)의 딸, 혹은 충공(忠恭)각간의 딸로 황아 왕후(皇娥王后)라고 한다. 소재사 향로[향완]는 1871년까지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전해오지 않는다. 헌덕왕비의 지원으로 향로를 주조한 것으로 보아, 이 때 소재사를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영국 박물관에 소장 중인 또 다른 소재사 향완이 있다. 이 향완에는 1358년(공민왕 7) 소재사의 지장보살 앞에 놓기 위해 제작했으며, 공민왕과 왕후인 노국 대장 공주(魯國大長公主), 명덕 태후(明德太后) 등 세 사람의 장수와 국가 안녕을 기원했다. 소재사는 고려공민왕 때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불사가 있었으며, 지장 신앙과 밀접했음이 확인된다.
도성사는 신라 시대 도성이 수도하여 현신 성불한 도성굴 아래에 지은 절이었다. 고려 초기 성범이 주석하면서 만일 미타 도량을 개설하였다. 이때 현풍 지역의 향도들이 향을 바치니 신비스러운 조짐이 많았다. 도성사는 피은한 승려들이 머물며 수도하였고, 서방 극락의 아미타불을 염원하는 정토 신앙 도량이었다.
속성사는 ‘도를 빨리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승려들의 수도처로 보인다. 최근에 천왕봉 기슭 유가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폐석탑과 절터로 추정되는 축대와 건물지 주춧돌 등이 확인되었다. 석탑은 기단부가 해체되어 세 조각으로 흩어진 채 지표면 위로 드러난 상태이다. 이곳이 속성사 터로 추정된다고 한다.
정백사는 당나라 때의 선승인 조주(趙州) 종심(從諗)[778~897]의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는 화두가 떠오른다. 속성사와 마찬가지로 승려들이 은거하던 산중 바위굴이나 높은 바위 위의 수행처였던 듯하다. 최근 비슬산 병풍 바위 인근의 속성사로 추정되는 절터에서 50m 정도 떨어진 암괴류에서 석불 좌상이 발견되었다. 불상은 머리와 한쪽 팔이 잘이 잘려나갔으며, 어깨에 걸친 옷주름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규모는 어깨 폭 55㎝, 앉은 자리 폭은 75㎝이다. 불상의 정확한 높이는 알기 어려우나, 목 둘레를 감안하면 1m 정도의 높이로 추정된다고 한다.
유가사는 김지대(金之岱)[1190∼1266]의 시에 소개되어 있다. 김지대는 1247년(고종 34)에 경상도 안찰사로 재임할 때 유가사를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유가사 석조 여래 좌상’[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50호]으로 보아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던 사찰이었다. 유가사는 유가종[법상종, 자은종]에 속한 사찰로, 고려 후기인 충렬왕과 충숙왕 때 국존을 역임한 홍진 국존 혜영(弘眞國尊惠永)[1228~1294]과 자정 국존 미수(慈淨國尊彌授)[1240~1327]가 주석하였다.
혜영은 일연의 뒤를 이어 1292년(충렬왕 18) 국존이 된 유가종의 고승으로, 동화사 홍진 국존비가 동화사에 건립되었다. 혜영은 1285년(충렬왕 11)에 유가사에 주석하다가, 1290년(충렬왕 16) 사경승(寫經僧) 100명을 이끌고 원나라의 대도(大都)로 가서 금으로 쓴 『법화경』을 원세조에게 바쳤다. 1291년 금니(金泥) 대장경의 사경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1292년 충렬왕이 국존으로 책봉하기 위해 유가사에서 개경으로 초빙하였고, 책봉식을 마친 뒤 동화사 주지로 임명되었다. 혜영은 대략 6년 정도 유가사에 머물렀다.
미수 역시 1324년(충숙왕 11) 국존에 책봉된 유가종의 고승이었다. 혜영은 1298년(충렬왕 24)에서 1308년(충렬왕 34)까지 대략 10여 년을 유가사에 머물렀다. 이때 충렬왕의 부탁으로 『법화경』 신해품과 『심지관경(心地觀經)』의 난해한 부분을 탁월하게 풀이하였다. 1321년(충숙왕 8) 법주사를 하산소로 삼았다가 동화사로 이주하였고, 1324년 국존으로 책봉되었다가 1325년 법주사로 옮겼다.
유가사는 고려 후기 국존을 역임한 유가종의 고승이 주석한 고찰로 명성이 높았다. 조선 조기에도 사찰이 유지되어 『경상도 속찬 지리지』[1469년]에 교종 사찰로 기록되었으나, 『동국여지승람』[1481년]에는 폐사되어 고적조에 수록되었다. 폐사된 유가사는 1682년(숙종 8)에 다시 중건되었다. 호은 유기(好隱有璣)[1707∼1785]의 「현풍 비슬산 유가사기」에 자세한 중건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현풍읍의 동쪽 10리에 있는 산은 비슬산이고, 절은 유가사이다. 이 절은 숙종 임술년[1682년]에 도경 화상(道瓊和尙)이 건립한 것이다. 원래 유가사에서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신라 시대에 창건한 원각사(圓覺寺)가 전해왔다. 도경이 처음 좋은 경치를 보고 또 서식하는 반송 한 그루를 사랑하였다. 이에 절을 이건하고 유가사로 이름을 바꾸니, 법당이 1동, 승려들의 요사채가 8동이었다.[『호은집』권4, 「현풍 비슬산 유가사기」]
유가사에서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신라 시대에 창건한 원각사(圓覺寺)가 있었다. 도경 화상이 이곳을 이건하여 유가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고찰이었던 유가사가 폐사되자, 인근에 있던 원각사를 이건하여 다시 중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유가사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 석탑은 서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원각사에 있던 것을 1920년에 옮겨 온 것이다.
인흥사는 일연이 11년간 주석하면서 인홍사를 크게 중수하여 충렬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이곳에서 일연과 제자인 선린 등이 『역대 연표』 등 다수의 불전을 출판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흥사의 제액은 공민왕이 썼다고 했으나, 충렬왕이 사액하였다. 이숭인(李崇仁)[1347∼1392]의 『도은집』「기제 인흥사(寄題仁興社)」시의 세주에 “인흥사에 금으로 쓴 열조(烈祖)의 사액이 있다.”고 한다.
기제 인흥사(寄題仁興社)[인흥사에 기제하다]
인흥사재포산록(仁興社在苞山麓)[인흥사는 포산 기슭에 자리 잡았는데]
석아증유반설형(昔我曾遊伴雪螢)[옛날 내가 노닐면서 반디와 눈과 짝하였네]
단월유시래예불(檀樾有時來禮佛)[단월이 때때로 찾아와서 예불하고]
도리청주좌담경(闍梨淸晝坐談經)[승려는 맑은 대낮에 앉아 불경을 얘기했다오]
립정일탑정정백(立庭一塔亭亭白)[뜰에는 탑 하나 하얗게 우뚝 섰고]
협도장송개개청(夾道長松箇箇靑)[길옆에는 낙락장송이 하나하나 푸르렀지]
최억황금천상필(最憶黃金天上筆)[가장 생각나는 것은 황금으로 쓴 천상의 글씨]
지금광염사화성(祗今光焰射華星)[지금도 그 광염이 화성을 쏘고 있으렷다]
[『도은집』 권2, 「기제 인흥사」]
성주 출신의 이숭인은 어린 시절 인흥사에 머물면서 과거 공부를 했던 듯하다. 이숭인은 인흥사 뜰에는 우뚝 솟은 하얀 탑이 하나 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2기의 석탑이 있었다. 그 중 1기는 1959년 경북 대학교 야외 박물관으로 이전했고, 1기는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의 수봉정사 앞에 있다.
조선 왕조는 건국 이후 지속적으로 억불 숭유 정책을 시행하였다. 국가에서 인정한 사찰은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그렇지 못한 사찰은 점차 쇠퇴하거나 폐사화하였다. 그리고 사찰에서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도 향교와 서원 등 유교 시설이나 사족의 경제적 기반으로 바뀌어 나갔다. 이런 점에서 조선 시대 유교 문화의 발전은 이전 시기의 불교 문화가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불 교체의 결과 유교 시설로 활용된 금화사(金化寺), 사족의 분묘를 수호하는 사찰[齋寺]인 정수암(淨水庵)의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① 금화사는 현풍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지금은 폐사하고 단지 옛 터만 남아 있다. 어느 시대에 창건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주초와 계단, 탑석이 매우 뛰어나고 정교하다. 폐기된 후에 향교, 서원, 관사의 계단과 주초는 모두 이곳의 석재를 가져가 사용했다고 한다.[『현풍현 읍지』 불우조, 1871년 편찬]
② 정수암은 현풍현의 서쪽 조설면(鳥舌面) 보로동(甫老洞)에 있다. 문경공(文敬公)[한훤당 김굉필]이 무덤 앞에 지은 누추한 초막의 옛 터이다. 지금은 암자가 되었다.[『현풍현 읍지』 불우조, 1786년 편찬]
금화사는 현풍현의 동쪽 5리에 있었는데 절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금화사에 남아 있던 주초와 계단, 탑석 등 각종 석조물을 가져가 현풍 지역의 향교와 서원, 관아 건물을 지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불교 문화재가 유교 건축물의 석재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정수암은 조설면 보로동에 있었는데, 김굉필이 분묘를 지키던 초막 터에 지은 암자인 분암(墳庵)이었다. 인흥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중건되지 못하고 빈터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 19세기 중반인 1834년(순조 34)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1812∼1874]가 터를 잡으면서,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사라진 인흥사의 절터가 사족의 세거지로 바뀐 것이다.
용연사는 비슬산 북쪽에 위치하며, 신라 말인 912년(신덕왕 즉위년) 보양 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용연사 삼층 석탑은 고려 시대에 조성되어, 보양의 창건 시기와 연결시킬 수 있다. 1407년(태종 7)에 여러 고을의 자복 사찰(資福寺刹)을 대신한 88개의 명찰 중 천태종의 대구용천사(龍泉寺)가 혹시 용연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 후기인 1673년(현종 14)에는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을 건립하고,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와 통도사에 모셨던 석가모니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하였다.
용천사는 비슬산 동쪽의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에 위치하며, 의상 화엄 십찰의 하나인 비슬산옥천사로 보인다. 일연은 용천사를 중수하여 불일사로 개명하고, 불일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불일 결사문」에 감동한 충렬왕은 불일사로 사액하였다. 조선 초기인 1437년(세종 19)에 황일류(黃日流)가 밀양용천사의 금자경(金字經)을 도둑질했다고 한다. 용천사에 금으로 사경한 경전이 있었다. 김진규의 「비슬산 용천사 고적기」에는 “의상이 창건할 때 옥천, 일연이 중수할 때는 용천이었는데, 불일(佛日)로 편액하였다.”고 정리해 두었다.
연화사는 창녕현에 있었던 사찰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연화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밀접하므로, 법화 신앙 도량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1407년(태종 7)에 여러 고을의 자복 사찰을 대신한 88개의 명찰 중에서 창녕 연화사(蓮花寺)가 조계종에 속했다. 연화사는 창녕을 대표하는 명찰로, 조계종에 속한 사찰이었다.
한편, 『현풍현 읍지』와 『여지도서』 등을 통해 비슬산의 사찰을 보완할 수 있다. 금천사(金泉寺)는 대견봉 아래에 있는데 옛 소재사를 이건하여 창건했다고 한다. 유가사의 소속 암자로 수도암(修道庵)과 동암(東庵)이 있었다. 용흥사(龍興寺)는 창녕현 북쪽 40리의 비슬산 남쪽에 있었다. 용흥사는 현재 국보 제75호로 지정된 ‘표충사 청동 향완’의 받침 안쪽에 ‘창녕 북면 용흥사(昌寧北面龍興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향완의 원래 소장처가 용흥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표충사 향완은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것으로,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향완이라고 한다.
9. 비슬산 불교문화의 특징
비슬산은 전통적인 산악신앙의 성소로 산신인 정성 천왕이 머무는 곳이었다. 정성 천왕은 현풍 지역의 지역 공동체를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숭배의 대상이었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전통 신앙의 신성지였던 비슬산에 다수의 사찰이 건립되어 불교와의 습합이 이루어졌다. 비슬산의 불교문화는 산악 숭배 사상과 현풍 지역의 역사·문화가 어우러져 발전할 수 있었다.
신라 시대 비슬산은 의상의 화엄 십찰인 옥천사가 건립되면서 화엄종의 터전이 되었다. 그리고 관기와 도성 등의 승려들의 성도한 수도처이자, 정토 신앙처로 명성이 높았다. 신라 하대에는 왕실에서 대견사를 비롯한 명찰을 창건하여, 불교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도 도성의 암자에 성범이 주석하여 만일 미타 도량을 개설하여, 정토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고려 후기 일연이 37년간 주석하면서 『삼국유사』를 찬술을 구상하고, 불일 결사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비슬산 정상부의 대견사 석조 관음보살이 땀을 흘려 나라의 변고를 예고하기도 했다. 특히, 용연사에서는 통도사에 모셔진 진신 사리를 봉안하면서, 한국 불사리 신앙의 터전이 되기도 하였다.
문헌 자료를 살펴본 바에 의하면, 비슬산의 사찰은 대략 20여 개소 이상이 확인된다. 절의 이름이 바뀌거나 폐사되어 없어진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보다 훨씬 많은 사찰이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슬산의 사찰을 중심으로 다수의 고승들이 수행하고, 지역민을 대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펼쳤다. 관기와 도성, 성범 등이 은거·수도하여 성도하였고, 의상을 계승한 화엄 승려들이 화엄 사상을 연찬하였다. 선종 가지산문 출신의 일연은 37년간 비슬산의 암자와 사찰이 주석하였고, 미수와 혜영 등 국사에 책봉된 유가종의 고승 대덕이 머물렀다.
불교 유산적인 측면에서는 인흥사 삼층 석탑을 비롯한 다수의 석탑, 용연사의 금강계단, 대견사의 석조 관음상과 같은 불상, 소재사의 향완과 같은 다양한 신앙 물품이 만들어졌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관기, 도성, 성범 등 포산구성의 아미타 정토 신앙, 대견사의 관음 신앙, 보당암에서의 문수 신앙과 다라니 신앙·법화 신앙, 소재사의 지장 신앙, 용연사의 불사리 신앙, 불일사의 불일 결사 등 다양한 신앙과 종교 운동을 표방하면서 지역민들의 귀의처가 되었다. 불교 종파적인 측면에서도 고려 시대의 4대 종파인 화엄종과 유가종, 선종과 천태종에 속한 사찰이 골고루 분포하여 공존 발전하였다. 명산인 비슬산의 명성에 걸맞는 다수의 명찰이 창건되어 그곳을 중심으로 승려들의 수행과 연찬이 이루어졌다. 지역민들의 기원과 신앙에 호응하여 다양한 신앙을 표방하였고, 불교계의 개혁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비슬산은 한국 불교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성지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