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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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達城郡]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invasions of Korea(1592~1598) |
이칭/별칭 | 임란,정유재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기선 |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달성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일본의 전국 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대륙 침략을 구상하였다. 이에 조선에 명(明)을 정벌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부, 교섭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2년(선조 25) 육군 15만 명과 수군 9천 명을 동원, 조선을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전국 시대를 거치며 많은 실전(實戰)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신식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조선은 오랜 기간 평화기가 지속되고 있었으며, 내부 정치와 행정의 혼란으로 국방력이 약화되던 시기였다. 이에 전쟁 발발 후 조선의 방어선은 단기간에 붕괴되었고 전국이 큰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과 달성군]
경상도는 일본군의 상륙지이며 교두보인 관계로 임진왜란 동안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개전 직후 부산성(釜山城)과 동래성(東萊城)이 함락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좌(左)·중(中)·우(右) 3로(三路)로 나뉘어 북상을 시작하였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일대인 대구 도호부와 현풍현은 일본군의 북상로 가운데 중로의 요지였다. 부산포에 상륙한 첫 번째 군대가 대구성을 점령하였으며 현풍(玄風)·성주(星州)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그 외의 경상도 지역 역시 일본군의 침입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경상북도 방면에 약 3만의 병력을 배치, 이곳을 후방 경비와 병참지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3만의 병력이 경상도에 배치되었음은 그만큼 경상도가 일본군의 작전·군사·교통에 중요한 위치였음을 말해 준다.
임진왜란 초기 승기를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정복하고, 이를 발판으로 명나라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며 실제 전쟁 초기 일본군은 단기간에 수도인 서울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계획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으로 인해 완전히 좌절되었다. 특히 경상도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이 봉기한 곳일 뿐만 아니라 규모 또한 가장 큰 지역이었다. 의병의 활동으로 인해 일본군은 고령(高靈)의 무계(茂溪)와 현풍(玄風) 등의 병참선을 포기하였고, 그들이 처음 계획했던 영산(靈山)-창녕(昌寧)-현풍-무계-성주를 잇는 낙동강 수운 활용 계획 역시 좌절되었다.
이순신(李舜臣)의 활약으로 남해의 제해권(制海權)이 봉쇄된 상황에서 경상도는 조선 최대의 곡창 지대인 호남을 지키는 관문이었다. 이러한 경상도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 일본군을 격파함에 따라 일본은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또한 이후 명의 원군이 대구를 중심한 경상도의 여러 지역에 주둔함에 따라 경상도는 일본군의 추격을 위한 전초 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즉 의병의 활약은 경상도가 일본군을 추격하는 전초 기지이자 그들의 북상을 막는 방어의 요충지로 기능하는 데 단초가 되었다.
[달성군의 의병장]
경상도의 의병은 임진왜란 극복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달성군에서도 많은 의병장이 배출되었다. 달성군 출신의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김충선(金忠善)·우배선(禹拜善)이 있다. 조선 시대 현풍현 솔례에서 성장한 곽재우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의(倡義)하였으며 낙동강의 요지인 정암진(鼎岩津)[현재의 경상남도 의령군]을 중심으로 의령(宜寧)·삼가(三嘉)·합천(陜川)·창녕·영산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낙동강 일대에서의 그의 활약은 왜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그의 활약은 다른 지방의 의병 봉기에 촉매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군민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장으로 조선을 침입한 김충선은 조선의 문물과 풍습을 흠모하여 귀화한 왜장이다. 귀화 후 김충선은 증성(甑城)[지금의 경상남도 울산시 학성동의 시루성] 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경주·울산·의령 등지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조총과 화약 다루는 방법을 조선군에게 전수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도 출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화원현 월촌(月村) 출신인 우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기병하여 화원 및 최정산(最項山)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당시 화원현은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전략상 요충지로 우배선의 의병 활동은 왜군의 교통로를 봉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의병은 유력한 재지 사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우배선의 가문은 단한하였고 본인도 20세의 백면서생(白面書生)에 불과했다는 점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