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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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本里里 仁興寺 - |
이칭/별칭 | 본리리 인흥사지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절터.
[개설]
본리리 인흥사(仁興寺) 터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의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 일대에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변천]
인흥사의 창건 연대와 창시자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본리리 인흥사 터에서 옮겨져 현재 경북 대학교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는 인흥사 터 삼층 석탑의 안내판에 의하면, 원래는 인홍사(仁弘寺)였으나 일연 선사(一然禪師)가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중수하여 인흥사(仁興寺)로 개칭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만 보면 이미 16세기경에 폐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여지도서(輿地圖書)』 성주목(星州牧) 불우조(佛宇條)에 인흥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8세기까지는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 마을에 들어온 시기로 보아서는 정확한 폐사 시기를 추정하기 어렵고, 사찰의 운영 시기는 석탑과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서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남평 문씨가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 마을에 터전을 잡은 것은 문익점(文益漸)의 18세손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1812~1874] 때이다. 문경호는 풍수에 조예가 깊어 문씨만의 마을을 만들 계획을 하고, 대찰인 인흥사가 있던 자리에 터를 잡아 정착하고 오늘날의 인흥 마을을 열었다.
[현황]
본리리 인흥사 터라고 추정되는 곳에는 현재 남평 문씨 세거지가 조성되어 있어 절터와 관련된 유물은 많지 않다. 현재 인흥사 터에는 탑제들과 주춧돌·돌 유구 등이 산재해 있다. 인흥사 터에 있던 2기의 석탑 중 1기는 경북 대학교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고, 1기는 현재의 수봉 정사(壽峰精舍) 앞 과수원에 미완성의 상태로 세워져 있다. 수봉 정사 앞에 있는 탑은 마모 상태가 심하여 잔존하는 석재의 명칭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층 기단 갑석 일부와 상층 기단 우주, 갑석 부분을 보수한 상태이고, 일부는 결실되어 전체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남평 문씨 종택에는 당시 인흥사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과 석조(石槽)[돌로 만든 통]가 함께 남아 있고, 1910년(순종 3)에 초가인 용호재(龍湖齋)를 헐고 광거당(廣居堂)을 지을 당시 사용된 기단석과 초석들은 이 부근 절터에서 나온 석재들이다. 또 부근에서 밭을 경작하면서 출토된 수막새 기와를 살펴보면, 통일 신라 시대의 유익사자문(有翼獅子紋) 기와[와당(瓦當)]와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귀목문(鬼目紋)과 주위에 단엽의 연화문 기와들이 동시에 출토되고 있어, 통일 신라 전후에 사찰이 창건되었고 이후에도 중수와 중창이 거듭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