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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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鋤齋里 遺蹟 |
영어공식명칭 | The Ancient Site at Seojae-ri, Dal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로24길 29[서재리 321-1]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조선/조선 |
집필자 | 이창국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 있던 통일 신라 시대와 조선 시대의 유적.
[위치 및 현황]
서재리 유적(鋤齋里遺蹟)은 와룡산[295m] 중앙부 서쪽 능선의 해발 53~55m 사이,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 있는 신성서진흥 더블 파크 아파트 103동 일원에 위치한다. 와룡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중앙부 능선의 말단부로 아파트 부지 중 남동쪽 가장자리에 해당된다. 발굴 전에는 산림이 우거져 있었고 일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유적을 제외한 아파트 부지 안에는 개인 주택 및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서 있었다. 주변으로는 서쪽에 서재 초등학교, 북쪽에 서재 중학교 및 대규모 아파트 단지, 동쪽에 개인 주택 및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유적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는 교육적·학술적 가치를 고려하여 3D 촬영을 실시하였으며, 특히 잔존 상태가 양호하고 연도부의 구조가 특징적인 1호는 경북대학교 박물관 야외 전시장인 월파원에 이전·복원되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공동 주택 건립을 위한 부지로 2003년 9월 15일부터 같은 해 10월 14일까지 지표 조사가 실시되었고, 2004년 2월 16일부터 그해 3월 23일까지 시굴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는 2004년 9월 13일부터 동년 12월 22일까지 영남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조사 결과 면적 3,850㎡에서 통일 신라 시대의 토기 가마 2기와 관련 회구부 1기, 조선 시대의 구상 유구 3기와 매납 유구 1기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통일 신라 시대의 토기류와 조선 시대의 자기류·옹기류 등 총 135점이 출토되었다.
토기 가마는 등고선 방향과 직교되게 2기가 약 2m 정도 거리를 두고 일렬로 나란하게 조성되었다. 일반적으로 가마의 아궁이가 풍향 등을 고려하여 동쪽이나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아궁이가 서쪽에 있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주변의 지형을 고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궁이 시설이 근대의 교란으로 인해 훼손된 1호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며 규모는 현 길이 456㎝, 폭 76~80㎝, 깊이 46㎝이다. 연도 시설 등의 훼손이 심한 2호는 평면 형태가 장타원형이며 규모는 현 길이 570㎝ 정도, 소성실은 84~94㎝ 정도, 깊이는 12~24㎝ 정도이다. 소성실에서 연소실로 연결되는 지점이 급격하게 좁아지는 특징이 있다.
2기 모두 반지하식의 굴가마[등요]이나 2호는 1호에 비해 벽체가 지상에 구축된 부분이 많은 지상식에 가까운 반지하식으로 추정된다. 가마의 부속 시설은 1호의 경우는 배구구와 회구부가 일부 남아 있으며, 2호는 회구부가 확인되지 않고 배수구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2기의 토기 가마는 거리가 2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동 시기에 조업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되며, 가마의 축조가 일반적으로 비탈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가는 양상이고, 2호의 회구부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1호가 먼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소성실 상부와 배수구에서 84점이 출토되었으며, 소성실 가마 위쪽 면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대부분 편으로 대다수의 기종이 목 짧은 항아리 아가리편[단경호 구연부편], 사발 아가리편[완 구연부편]이며, 일부 파수와 소성 불량 토기 등으로 대부분의 기종이 생활 토기이다. 인화문은 사발[완]에서 대부분 확인되는데, 문양으로는 종장 연속 점열문, 종장 연속 마제형문(馬蹄形文)[말발굽 모양 무늬], 종장 연속 마제형문+국화문이 확인된다. 이를 바탕으로 궁천정일(宮川禎一)의 시기 구분에 의하면 가마의 조업은 7세기 말이나 8세기 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시대의 구상 유구는 총 3기가 확인되었으며, 모두 등고선 방향으로 축조되었다. 길이는 1호가 21m, 2호는 12m, 3호는 6m 정도이고, 너비는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곳에는 30~50㎝이며, 경사가 심한 곳은 150~285㎝이다. 출토 유물은 총 21점으로 자기류와 옹기류 등이다. 특히 3호구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기종으로는 접시와 사발이 대부분으로 완형은 없으며, 대부분 편이다.
[의의와 평가]
서재리 유적에서 확인된 통일 신라 시대의 생산 유적은 이 시기 달성군 지역의 생활상과 토기 생산 체계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초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