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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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玄風邑 池一里 - 瑞興金氏 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재영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리에 있는 서흥 김씨 집성촌.
[개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1리 못골마을은 서흥김씨(瑞興金氏) 집성촌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11세손이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정제(金鼎濟)가 지금의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서 살다가 1778년(정조 2)에 입향한 이래 서흥김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지금도 20여 가구의 서흥김씨들이 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서흥김씨들의 못골은 한훤당 김굉필의 종가가 자리하며, 그 후손들이 사는 마을로 유명하다. 김굉필은 1454년(단종 2)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관으로 어모장군(御侮將軍)이었던 김유(金紐)이다. 본관은 황해도 서흥이지만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낸 증조할아버지가 현풍 곽씨와 결혼해 처가인 현풍으로 내려오면서부터 현풍인이 되었고, 할아버지가 개국 공신인 조반(趙胖)의 사위가 되어 서울 정동에 살게 되어 여기서 태어난 것이다. 19살에 순천 박씨(順天朴氏)와 결혼해 합천군 야로현에 있는 처갓집 개울 건너편에 서재를 짓고 한훤당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지내다가 바로 지금의 현풍 도동으로 옮겨와 살았다. 이 시절 한훤당은 서울의 본가와 야로의 처가, 성주 가천의 처외가 등지를 오가며 선비들과 사귀고 학문에 힘썼다.
1474년(성종 5) 봄, 20세의 한훤당은 당시 함양 군수로 있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고, 36세가 되던 1480년(성종 1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고, 1494년(성종 25)에는 학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점을 들어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어 여러 낮은 관직을 거쳤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형조 좌랑(刑曹佐郞)까지 올랐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에서 유발된 무오사화 때, 한훤당은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도당(徒黨)이라는 혐의를 받고 곤장 80대와 유배형을 받고 평안북도 희천으로 귀양을 갔다. 그때 한훤당의 나이는 45세였다. 47세 되던 해 한훤당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되어 북문 밖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무오사화의 관련자들에게 죄를 추가하여 한훤당은 결국 사사 당했다. 칠 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향년 51세였다.
한훤당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고 나서 1507년(중종 2)에 복권되어 도승지를 증직(贈職) 받고, 1575년(선조 8)에는 다시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0년(광해군 2)에 문묘에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우두머리로 받들게 되었으니 생전에 받지 못한 대우를 사후에 더 없는 영광으로 받은 셈이었다.
[현황]
16세기 중반 서원이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할 때,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한훤당의 외증손자이자 예학에 밝았던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1568년(선조 2) 한훤당을 모시는 쌍계 서원(雙溪書院)을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604년(선조 37) 지금의 자리에 먼저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과 서원 일곽을 완공하였다. 선조는 이 서원에 도동 서원(道東書院)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었다. 현재 지 1리 못골 근처에 있는 도동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지 1리 못골에는 김굉필의 종가가 있다. 5,950㎡의 대지 위에 명문 서흥김씨를 상징하는 종가 안채와 제청, 가묘, 행랑채, 광채, 대문채 등이 배치되어 있다. 종가에는 한훤당의 불천위(不遷位) 위패가 모셔져 있고, 종가는 매년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다. 마을에는 종가 외에도 한훤당의 후손 김언숙(金彦塾)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이락재(尼洛齋)와 김용재(金用齋) 및 김영운(金永運)을 추모하기 위한 재사 용연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