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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이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579
한자 輓詞[李輈]
영어공식명칭 Funeral Ode For Teacher Gye-dong Written By Lee-Joo
이칭/별칭 「계동선생만사」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곽명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56년 - 「만사」[이주] 저자 이주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585년연표보기 - 「만사」[이주]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04년 - 「만사」[이주] 저자 이주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859년 - 『계동집』 간행
배경 지역 연경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지도보기
배경 지역 계동선생유적비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지도보기
배경 지역 서계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호국로51길 45-17[서변동 881]지도보기
성격 애제류|만사
작가 이주

[정의]

조선 전기 학자이며 의병장인 이주가 대구 출신 문신 전경창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만사.

[개설]

「만사」[이주] 저자 이주(李輈)[1556~1604]의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는 경임(景任)이고, 호는 태암(苔巖)이다. 이주는 1556년(명종 11)에 대구부 수성현 파잠리(巴岑里)[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고, 후에 무태(無怠)[현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로 옮겨 살았다. 전경창(全慶昌)[1532~1585], 정구(鄭逑)[1543~1620],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문인이고, 정경세(鄭經世)[1563~1633] 등과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일어나자 서사원(徐思遠)[1550~1615]과 함께 창의병(愴義兵)을 모집한 뒤, 군량을 조달하고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있었다. 대구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전경창의 본관은 경산(慶山)이며, 자는 계하(季賀)이고, 호는 계동(溪東)·만오(晩悟)이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인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전순(全珣)이고, 어머니는 김해송씨(金海宋氏) 송식(宋軾)의 딸이다. 대구부 수성현 파잠리[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관직은 예조좌랑·병조좌랑·검열·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대구 유학의 개조(開祖)로 평가받으며, 대구 유학의 수서원(首書院)인 연경서원(硏經書院) 창건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대구광역시의 연경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계동집(溪東集)』이 있다.

「만사」[이주]를 「계동선생만사」라고도 한다.

[구성]

「만사」[이주]이주전경창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내용]

이인통의홀운망(伊人痛矣忽云亡)[애통하도다, 선생이시여! 갑자기 돌아가시다니요]

기재공사총가상(其在公私摠可傷)[공사 간 할 것 없이 모두가 슬퍼하고 있습니다]

대부당언기보궐(臺府讜言期補闕)[사헌부에서의 곧은 말로 조정 정사에 도움 기약하셨고]

제형담락조칭향(弟兄湛樂早稱鄕)[형제간에 화락하여 일찍부터 고향의 칭송 있었지요]

위랑미진단심원(爲郞未盡丹心願)[낭관 되어 정성스런 마음과 소원 다 펼치지 못하시고]

불로난성녹야당(不老難成綠野堂)[늙지 않은 나이라 녹야당마저 이루지 못하셨네요]

무자행능오유후(無子幸能吾有後)[아들은 없으나 다행히도 우리 같은 후예들 있으니]

고원매죽감처량(故園梅竹减凄凉)[옛 동산의 매화와 대나무가 처량함 덜어 주네요]

[특징]

「만사」[이주]는 ‘양(陽)’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칠언율시이다. 장수를 누리지 못한 전경창에 대한 안타까움과 전경창을 잃은 아픔을 절절하게 읊었다.

[의의와 평가]

「만사」[이주]는 대구(對句)의 정연함이 돋보이는 한시이다. 어휘의 성격과 내용을 고려하여 대(對)를 맞추어 운율감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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