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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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宗大王 胎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310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헌재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488년 - 중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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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507년 - 중종대왕 태봉 건립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544년 - 중종 사망 |
이장 시기/일시 | 1929년 - 중종대왕 태봉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봉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6월 19일 - 중종대왕 태봉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6호 지정 |
개축 시기/일시 | 1987년 - 중종대왕 태봉 복원 |
현 소재지 | 중종대왕 태봉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310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세종로 1-57] |
성격 | 태실 |
관련 인물 | 중종 |
문화재 지정 번호 |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6호 |
[정의]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에 있는 조선 중종의 태봉.
[개설]
중종대왕 태봉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태를 안치했던 왕가의 태실이다. 태실은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산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태실은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왕세자나 왕세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태봉(胎封)으로 가봉될 것을 감안하여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변천]
중종대왕 태봉은 1507년(중종 2)에 왕의 태실로서 격식을 갖추어 석물이 설치되었다. 이때 태실이 있던 가평현이 가평군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29년 전국에 산재한 태실 54기를 한곳에 모아 관리한다는 방침에 따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봉되었는데, 이봉 과정에서 석물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1982년 12월 1일에 태를 봉안했던 석함과 부재 등이 발견되어 1987년에 원래의 자리인 현재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태 항아리와 태지석(胎誌石)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형태]
중종대왕 태봉을 복원하며 중종이 4세 되던 1492년(성종 23)에 세운 아기 비를 보수하여 세웠다. 뒷면에 ‘홍치오년구월초칠일해시립(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立)’이라 쓰여 있다. 지붕돌은 높이 50㎝, 비신(碑身)은 너비 48㎝, 두께 19㎝, 높이 75.5㎝의 크기이다. 아기 비 옆에는 중종이 즉위한 뒤 가봉한 태실비를 세웠는데, 지붕돌은 높이 45.5㎝, 비신은 너비 53㎝, 두께 21.5㎝이다. 높이는 중간 부분이 없어져서 보충한 52㎝를 포함하여 116㎝이다. 귀부는 머리가 없어진 상태이다.
[현황]
중종대왕 태봉은 1986년 6월 19일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