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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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 時代 |
영어공식명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현희 |
[정의]
조선왕조가 존속한 1392년부터 1863년까지 경기도 가평 지역의 역사.
[행정구역]
가평은 조선 건국 직후에는 고려 시대에 이어 강원도 춘천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때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토착 향리가 지역을 통솔하였다. 1396년(태조 5)에 이르러 가평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고, 조종현(朝宗縣)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강원도로부터 분리되어 경기좌도에 이속되고, 지방관도 감무가 아닌 현감(縣監)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중종이 즉위한 후 1507년(중종 2)에는 중종의 태(胎)가 봉안된 곳이라 하여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다. 1697년(숙종 23)에는 역적으로 처벌받은 이영창(李榮昌)이 태어난 곳이라는 이유로 현으로 강등되었으나, 10년 만인 1707년(숙종 34)에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시대 가평 지역을 이해할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오늘날의 가평군과 영역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북한강 남쪽에 위치한 설악면과 청평면 일부 지역의 경우, 조선 시대에는 인접한 군현인 양근(楊根)[지금의 경기도 양평군]의 북면과 서종면에 편제되어 있었다. 반면에 남양주시 수동면의 내방리·외방리·입석리 등은 조선 시대에 가평군 소속이었다. 또 현재는 강씨봉에서 국망봉을 잇는 능선이 포천시와의 경계를 이루지만, 조선 시대에는 강씨봉 위쪽에 있는 도성령 북동쪽의 적목리 부분이 영평군(永平郡)[지금의 포천시]에 속해 있었다.
[마을 편제]
조선 시대 지방 사회는 면리제(面里制)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사람들이 모여 살던 자연촌을 리(里)로 편제한 후, 몇 개의 리를 모아 면(面)을 구성하였다. 가평의 면리제 현황은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를 통해 자세히 파악해 볼 수 있는데, 우선 면은 군내면(郡內面)·북면(北面)·남면(南面)·서면(南面)·조종면(朝宗面)의 5개 면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리는 군내면에 항교리(鄕校里)·달전리(達田里)·개곡리(開谷里)·마장리(馬場里)·승안산리(僧安山里)·대곡리(垈谷里)의 6개 리, 북면에 이곡리(梨谷里)·제구령리(濟救寧里)·목동리(沐洞里)·물내리(勿乃里)·도대리(道大里)·백둔리(栢屯里)의 6개 리, 남면에 이영동리(梨永洞里)·비령대리(飛靈垈里)·복장포리(福長浦里)·고성리(高城里)·호명리(虎鳴里)의 5개 리, 서면에 방동리(坊洞里)·입석리(立石里)·대승리(大升里)·잠곡리(潛谷里)·하감천리(下甘泉里)·상감천리(上甘泉里)·수리현리(愁理峴里)·색현리(色峴里)·삼의곡리(三儀谷里)의 9개 리, 조종면에 율길리(栗吉里)·연동리(連洞里)·항사리(項沙里)·임초리(林草里)·현리(懸里)·판미리(板尾里)·신복리(新卜里)·대부산리(大釜山里)의 8개 리가 있었다. 오늘날 가평군에 속해 있는 양근의 북면(北面)에는 초곡동리(草谷洞里)·수산리(水山里)·현동내리(懸洞內里)·방일동리(放逸洞里)·소설동리(小雪洞里)의 5개 리가 있었다. 또 양근 서종면(西終面)의 경우에는 여러 리가 있었지만, 양근읍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화야동리(禾也洞里)가 오늘날의 설악면 지역에 있던 리로 보인다.
1789년(정조 13)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엿보이는데, 조종면이 조종상면(朝宗上面)과 조종하면(朝宗下面)으로 분리된 것이 가장 큰 차이이다. 또한 일부 면의 경우에는 리의 구성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인구와 성씨]
현재 가평의 호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여러 다른 자료를 통해 인구 추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세기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가평에는 288호, 987명이 있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1759년(영조 35)의 호적 통계가 실려 있는데, 2,445호에 합계 인구 6,912명[남 3,825명, 여 3,087명 ]이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의 경우에는 1,922호, 6,453명[남 3,587명, 여 2,866명]이 확인된다. 또 오늘날 가평군에 속해 있는 양근군 북면의 경우는 601호, 1,609명[남 774명, 여 835명 ]이었다. 따라서 현재의 가평군에 속한 지역의 인구와 호수를 모두 합하면 2,523호, 8,062명[남 4,361명, 여 3,701명]이 된다. 마지막으로 『경기지』에서는 1840년에 2,023호, 5,623명[남 3,184명, 여 2,439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씨의 경우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가평의 토성(土姓)으로 탁씨(卓氏)·간씨(簡氏)의 2개 성이 있었고, 망성(亡姓)으로 장씨(張氏) 1개 성이 있었으며, 속성(續姓)으로 박씨(朴氏) 1개 성이 있었다. 조종현에는 토성으로 현씨(玄氏)·호씨(胡氏)·이씨(李氏)의 3개 성이 있었고, 망성으로 형씨(邢氏)·박씨(朴氏)의 2개 성이 있었으며, 내성(來姓)으로 한씨(韓氏) 1개 성, 속성으로 김씨(金氏) 1개 성이 있었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같은 성씨들이 확인되며, 현재의 가평군 설악면에 해당하는 미원(迷源)의 경우에는 함씨(咸氏)가 기재되어 있다.
[군사 동원]
조선 시대에는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良人) 남자라면 모두 직접 군인으로 나가거나 군인의 비용을 대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 전기인 1454년(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체 가평 인구 987명 중에 시위군(侍衛軍)이 96명, 선군(船軍)이 43명 편성되어 있었다. 시위군은 일반 양인이 수행하던 보편적인 군역인데, 규정상 8번 교대로 2개월씩 지방의 요새나 수도로 가서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선군은 수군을 말하는데, 1년에 6개월을 근무하여야 하는 부담이 큰 병종이었다. 자기 차례가 되면 1개월의 식량을 지고 정해진 부대로 가서 배를 타고 근무하였고, 국방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농토를 경작하는 등 많은 일에 동원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경우는 총 남성 인구가 3,825명이었는데, 군병으로 1,653명이 편제되어 있었다. 훈련도감에 115명, 어영청에 192명, 금위영에 192명, 수어청에 539명, 병조에 323명, 중추부에 59명, 공조에 26명, 군기시에 58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외에 경기도 감영에 기수보(旗手保)로 소속된 인원 18명, 선무군관(選武軍官) 34명이 있었다.
[재정 운영]
군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일반 재정은 관수(官需)라고 하는데, 미(米) 100석(石)이 배정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수령에게 딸린 인물들의 식품 비용으로 지출하는 액수를 아록(衙祿)이라 하는데, 매년 미 4석(石) 3두(斗) 5승(升)이 배정되었다. 관아의 수선과 밖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는 비용인 공수위(公須位)는 콩 13석 12두 3승이었다. 기름·꿀·종이로 만든 자리[지지(紙地)]의 비용도 책정되어 있었는데, 좁쌀 15석 7두 2승이었다. 이외에 군의 소용을 위해 토지 4결(結)당 꿩과 닭을 각 한 마리씩 내야 했는데, 매년 189결 정도의 토지가 부담하였다. 가평군 전체에서 매년 47마리 정도의 꿩과 닭을 군의 재정을 위해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꿩과 닭 이외에도 각 가호에서는 땔나무 4묶음, 풀 1묶음, 숯 1말도 부담해야 하였다.
[농업과 산업]
조선 시대 가평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토양이 비옥하지 못하며 산이 높고 일찍 추워진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농업에 유리한 여건은 아니었다. 주된 재배 작물은 역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쌀·보리·조·콩·기장의 오곡과 조, 팥, 참깨, 뽕나무, 삼 등이었고, 밭농사의 비중이 높았다. 또 화전도 일부 경작되었다.
가평의 전답 상황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조선 전기와 후기에 큰 차이가 보인다. 15세기 중엽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가평의 총 경작 면적은 3,057결, 논은 123결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인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토지 대장에 실린 전체 밭 면적이 533결 83부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533결 83부 중 실결(實結)[자연재해를 입어 경작되지 못한 토지와 면세전을 제외한 실제 수세(收稅) 면적]은 1759년(영조 35)의 경우 225결 99부에 불과하였다. 논의 경우는 토지 대장에 실린 면적이 51결 25부, 실결은 13결 31부였다. 조선 전기와 후기의 이러한 차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며 전국적으로 경작 면적이 크게 줄어든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또 가평 지역이 전반적으로 농업에 유리한 토지가 아니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듯하다.
가평 지역은 농업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들뽕나무와 산뽕나무가 무성하여 대신 양잠업이 발달하였다. 1416년(태종 16) 2월에 전국 최초로 잠실(蠶室)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산물로는 꿀, 영지, 복령(茯苓), 잣, 송이, 느타리버섯, 산겨자, 당귀, 밤, 석이버섯 등이 유명하였고, 황옥(黃玉), 녹반(綠礬), 은, 아총(芽蔥) 등의 광물질도 생산되었다. 또 재배 작물은 아니지만 가평에서 생산되던 물자 중에 중요한 것으로 목재를 들 수 있다. 가평은 산이 많아 목재의 생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강이 있어서 목재 수송에도 유리하였다. 국가에서는 목재 조달을 위해 가평 지역에서 일반인의 산악 출입이나 벌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장시]
조선 시대에는 5일에 한 번씩 주민과 보부상이 모여 생활용품을 거래하는 장시(場市)가 열렸다.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경기지』에 따르면 가평의 장시는 군내면 객사촌과 서면 조종천 가에 한 곳씩 있었다. 군내면의 장시는 동헌(東軒)[조선 시대에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던 건물]에서 1리 거리에 있었는데, 동헌과 객사 사이에 장시가 열리는 광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종천 가의 장시는 오늘날의 조종천교 부근에서 열렸는데, 조종면과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장시가 열리기에 알맞은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오늘날 설악면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미원장(迷源場)이 있었다. 가평과 양근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있었으며, 매달 2일과 7일에 장이 열렸다.
[교통과 통신]
조선 시대 가평에는 감천역(甘泉驛)과 연동역(連洞驛)이 있었다. 감천역은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읍의 남쪽 15리에 있었다. 서울 방향으로는 구곡역(九谷驛), 춘천 방향으로는 안보역(安保驛)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상천역 주변이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8세기 중엽의 시점에 사람이 타는 말 2필, 짐 싣는 말 1필이 있었으며, 역리(驛吏) 5명, 노(奴) 11명, 비(婢) 7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연동역은 가평에서 포천으로 나가는 길 위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읍의 서쪽 45리 되는 곳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면 연하초등학교 자리라고 전해진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8세기 중엽에 대마(大馬) 1필, 사람이 타는 말 1필, 짐 싣는 말 3필, 역리 10명, 노 13명, 비 3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19세기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연동역과 감천역에 각 5결의 역위전(驛位田)이 배정되어 역의 운영 경비를 대고 있었다.
공영 여관인 원(院)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적률원(狄栗院)과 임초원(林草院) 두 곳이 있었다. 적률원은 읍의 서쪽 22리 되는 곳에 있었고, 임초원은 읍의 서쪽 34리 되는 곳에 있었다. 임초원은 현재 상면 임초 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적률원의 위치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역과 원이 가까운 곳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적률원은 감천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민간의 경제 활동이 늘어남에 따라 사설 숙박 시설인 점막(店幕)이 원을 대신해 성행하였다. 19세기 중엽 무렵 군내면 비석거리·마장리, 북면 이곡리·죽둔리·흥적리·감천리·청평천·대승리, 조종상면 율길리[현 상면 율길리], 하면 현리[현 조종면 현리] 등에 점막이 있었다.
가평은 북한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특성상 나루도 발달하였다. 가평의 나루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은 군내면에 있던 안반나루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안반나루를 건넌 후 춘천을 통과하여 홍천으로 이어지는 길이 표시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달전리 ‘안반지’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가평에는 안반나루 이외에 금대나루, 양진나루, 대승리나루 등도 있었다. 금대나루는 남면에 있었으며, 춘천으로 넘어가는 나루였다. 양진나루도 남면에 있었는데, 양근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대승리나루는 서면에 있었으며, 역시 양근으로 통하는 나루였다.
봉수의 경우에는, 가평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지 않은 관계로, 정부에서 제도화한 봉수로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서면 깃대봉, 보납산 옆 문필봉 등에 봉화대가 있었다고 전하며, 청평면 호명산에서 봉수 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