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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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濩 |
영어공식명칭 | Han Ho |
이칭/별칭 | 석봉(石峯),경홍(景洪),청사(淸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인재 |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가평군수를 역임한 문신이자 서예가.
[개설]
한호(韓濩)[1543~1605]의 본관은 삼화(三和)이다. 자는 경홍(景洪)이고,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이다. 한대기(韓大基)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한언공(韓彦恭)이다. 한석봉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활동 사항]
한호는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한 후 활인서(活人署) 별제(別提), 와서(瓦署) 별제(別提) 등의 관직을 거쳐, 사헌부 감찰, 한성부 판관, 호조 정랑, 가평군수(加平郡守), 흡곡현령(歙谷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이외에 사자관(寫字官)[조선 시대 승문원과 규장각에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으로서 국가적인 서사 업무를 맡아보았고,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도맡아 담당하였다.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한호는 어린 시절부터 글씨를 익혀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능통했다고 하는데, 왕희지의 서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서풍을 이루었다. 한호로 인해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 특유한 서체, 즉 사자관체(寫字官體)가 창출될 정도로 당대에 큰 영향력을 가졌다. 나아가 한호의 서풍은 사자관 이외에도 왕실과 문인, 지방의 학동(學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 의해 수용되었다. 특히 『석봉천자문(石峰千字文)』, 『초천자(草千字)』 등은 조선 말기까지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는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한호는 「서경덕신도비명(徐敬德神道碑銘)」[1585], 「초서천자문(草書千字文)」[1597], 「이백시 망여산오로봉(李白詩 望廬山五老峯)」[1603], 「한유시 검명(韓愈詩 劒銘)」[1604] 등을 썼다. 또한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이윤식비(李允湜碑)」·「이별제공즙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비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長湍) 「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忭墓表額)」, 과천(果川) 「유용비(柳容碑)」·「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 「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 「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 「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鄰碣)」·「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 「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 「기자묘비(箕子廟碑)」 등을 썼다.
[묘소]
한호의 묘는 고향인 개성 인근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