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017
한자 高麗 時代
영어공식명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배상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018년 - 거창현, 합주에 소속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111년 - 거창 가섭암지 마애 여래 삼존 입상 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161년 - 감음현, 부곡제 지역으로 강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71년 - 거제현, 가조현으로 이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83년 - 정원보의 안집 사칭 사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90년 - 감음부곡이 감음현으로 회복

[정의]

918년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경상남도 거창 지역의 역사.

[개설]

고려 시대[918~1392] 거창 지역은 진주목(晉州牧)-합주(陜州)의 관할로 행정 구역상 거창현(居昌縣)·가조현(加祚縣)·감음현(感陰縣)·이안현(利安縣)·삼기현(三岐縣)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고려 전기까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가운데 향촌의 자치 활동에서 향리(鄕吏)들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향리들은 주로 토성(土姓)들로서 상경하여 벼슬에 나아가기도 하였으며, 향권(鄕權)을 둘러싸고 상호 경쟁하기도 하였다. 유력 성씨로는 신씨(愼氏)·유씨(劉氏)·사씨(史氏)·장씨(章氏) 등이 있었다. 한편, 12세기에 들어 거창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며 13세기 후반에는 고려 정부의 해방(海防) 정책으로 거제현이 그 속현인 아주현·송변현과 함께 가조현으로 이주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이원달(李元達)과 유환(劉懽) 등은 금원산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신라 말 고려 초 사회 전환기의 거창]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 역사상 큰 전환기였다. 신라의 전제 왕권이 무너지면서 왕권을 둘러싼 정쟁이 계속되고,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농민층의 분해 현상이 두드러졌다. 농민 항쟁이 빈발하는 가운데 비판적 지식인들과 새로운 정치 세력이 결집하는 가운데 마침내 분국(分國)의 상황은 고려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 거창에는 유학자 박유(朴儒)가 궁예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내려와 박유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거창 출신의 승려 희랑(希朗)왕건(王建)견훤(甄萱)이 쟁패를 겨루던 시기 해인사 승려들을 이끌어 고려에 의한 후삼국의 통합에 힘을 보탰다. 당시 희랑은 해인사 주지로 있으면서 태조 왕건의 귀의를 받아 전지(田地) 오백 결(結)을 시주로 받고 가람을 크게 중건하여 해인사의 위상을 높였다.

[지배와 자율이 살아 숨쉬는 고을]

고려 시대 거창 지역은 행정 구역상 거창현·가조현·감음현·이안현·삼기현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거창현은 1018년(현종 9) 합주에 내속되었으며 1172년(명종 2)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었다. 가조현은 원종거제현에 이속되었고 감음현은 1161년 부곡제(部曲制) 지역으로 강등되었다가 회복하면서 이안현을 그 관할에 두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는 군현제(郡縣制)를 통하여 지방관을 파견해 해당 지역을 관할하였다. 중앙 집권적 성격의 군현제 구조에서 거창 지역 고을들은 상당 기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아 ‘원님이 없이도 돌아가는 고을’로 자율적 요소가 강한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상당 기간 지역의 유력가인 향리들이 행정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읍사(邑司)에서 근무하며 조세(租稅)와 역역(力役)의 징수를 비롯하여 간단한 소송을 처리하기도 하였으며 직제상(職制上)으로 호장(戶長)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이들은 때로 향권(鄕權)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기도 하였는데, 1161년(의종 16) 감음현에서 발생한 자화(子和)와 의장(義莊)의 무고 사건은 대표적 사례였다. 이 사건으로 감음현은 감음 부곡으로 강등되었고, 다시 현으로 회복된 것은 1390년(공양왕 2)에 들어서였다.

[고려 후기 사회 변화와 내우외환의 영향]

12세기와 13세기의 고려 사회는 수리 시설의 확충, 저습지의 개간과 방조제의 수축, 농법상의 변화 등으로 인해 여러 방면에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중앙 정부와 연계된 지방관의 권농 활동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지역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노력이 전제된 것이었다. 1172년 거창현에는 감무가 파견되었으며 6년 뒤인 1178년(명종 8) 관내 우거향(亏居鄕)에서는 2월에 민가에서 쓰러진 배나무가 저절로 일어나고 가지와 잎이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또 같은 해 4월 이안현에서는 쓰러졌던 나무가 다시 일어나는 이변이 일어났다고도 한다. 어쩌면 이들 기사는 당시 거창 지역의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해석해 봄 직한 사건이었다.

고려 후기는 대외적으로 몽골과 왜구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안으로는 몽골과의 강화에 반발한 삼별초 세력이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구도에서 지방 사회가 동요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특히 거창 지역은 내륙이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1270년(원종 11) 6월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의 환도를 결정하였다. 이에 반기를 든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은 진도 용장성(龍藏城)을 수도로 삼고 남해도(南海島)를 중간 거점으로 삼아 거제도(巨濟島)를 장악하였으며, 연해를 넘어 내륙 지역을 공략하고 있었다. 한편, 고종 연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왜구들은 충정왕~공민왕 대 집중적으로 출몰하여 남해 연안의 도서들을 점령하다시피 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려 정부는 해방 정책의 일환으로 도서 지역의 치소를 내륙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섬 지역인 거제도 주민들을 거창으로 옮겨와 살게 하였다. 관청과 수령, 향리들은 물론 그 속현인 아주현송변현, 그리고 오양역이 이동해 왔다. 당시 거제현의 치소는 가조에, 아주현거창현의 동쪽 10리 거리에, 송변현은 남상 무촌역 남쪽 14리 지점에, 오양역은 가조 서쪽에 위치하였다.

한편, 이 기간 주민들의 피해를 전하는 기록으로 왜구에게 잡혀간 아버지를 구출한 반전(潘腆)의 사례와 ‘절부리(節婦里)’ 지명을 낳은 탐진 최씨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반전은 안음인이었다. 그는 산원(散員) 벼슬을 한 인물로 향리에 내려와 있었다. 1388년(우왕 14)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쳐 아버지를 잡아가자, 반전은 덩어리[은정(銀錠)]와 은띠[은대(銀帶)]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적을 설득해 아버지를 돌아오게 하였다. 또한 당시 왜구들은 납치, 살인, 방화 등을 서슴없이 자행하였으며, 여자들을 욕보였는데 최씨 부인은 왜구들의 겁탈 위협에 죽음으로 맞서 저항한 인물이었다.

[고려 말 사회 모순과 안집 사칭 사건]

고려 말은 대외적으로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들의 노략질이 빈번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권세가들의 토지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많은 사회 모순이 노정되던 시기였다. 특히 토지 침탈은 농민들의 부세(賦稅) 부담을 가중시키고 국가 재정을 좀먹게 하여 사회 존립의 기반을 흔들었다. 이에 중앙 정부는 지방에 파견된 수령의 명칭을 안집사(安集使)로 바꾸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즈음 거창에서는 정원보(鄭元甫)의 축재 사건이 발생하여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1383년(우왕 9) 전직 낭장(郎將)인 정원보는 거창현 안집사를 사칭하며 재물을 축적하다 발각되어 결국 죽임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는 이전에도 천령(川寧)에서 안집사를 사칭하며 죄수들을 달아나게 한 이력의 소유자였는데, 고을 수령을 사칭하면서 재물을 편취하는 부조리한 사회상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는 종막을 고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이 건국되자 이원달과 유환 등은 금원산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수준 높은 불교 문화의 자취들]

고려 시대 거창 지역은 불교 문화가 융성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가 유적으로 남아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거창읍 소재의 보물 제378호 거창 상림리 석조 보살 입상은 연화대 위에 안치한 석주형 석불로 왼손에 연꽃, 오른손에 정병(淨甁)을 쥐고 있는 형상의 관음 보살 입상이다. 건흥사(建興寺)에 속한 석불로 추정되며 고려 초 거창 지역 불교 신앙의 경향을 엿보게 해 준다.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의 보물 제530호 거창 가섭암지 마애 여래 삼존 입상은 바위면 전체를 배[舟] 모양으로 파서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三尊佛)을 새겼는데 1111년(예종 6)의 조상기(造像記)도 함께 있다. 연꽃무늬 대좌(臺座)와 새의 날개깃처럼 좌우로 뻗친 옷자락 등은 삼국 시대 불상 양식을 바탕에 드리우면서 고려적인 요소를 가미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불상의 조성 주체는 왕실과도 연계된 인물로 추정되며, 조상기의 내용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베푼 은혜를 새기며 극락왕생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포함되고 있다.

북상면 탑불(塔佛) 마을에 소재한 갈계리 삼층 석탑은 사각형으로 된 이중 기단을 둔 통일기의 석탑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이후 석탑의 변화 양상을 잘 보여 주는 불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변에서 수습되는 기와 조각과 자기 조각 등은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법등(法燈)을 밝힌 사찰의 불탑임을 알려 준다.

남상면 임불리 소재의 천덕사지(天德寺址)는 발굴 조사를 통해 고려 시기 가람의 모습이 확인된 유적이다. 다량의 자기류, 금속류, 석제품 등을 통해 사찰 내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는 3층 석탑을 중심축에 두고 좌우 대칭형으로 조성된 평지 가람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한편, 금귀봉 기슭에 자리잡은 사적 제239호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屯馬里壁畵古墳)은 양쪽 돌덧널 벽면에 회칠을 하고 흑·녹·갈색으로 인물을 그린 벽화로 유명하다. 붓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생기가 넘쳐나는 벽화의 내용은 불교 신앙을 중심에 두면서 도교적 요소도 일부 가미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토속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고려 고분 벽화의 대표적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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