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001 |
---|---|
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배상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562년(진흥왕 23) - 거열국 멸망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663년(문무왕 3) - 거열성 함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665년(문무왕 5) - 신라 거열주 설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673년(문무왕 13) - 만흥사산성 건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757년(경덕왕 16) - 거열군에서 거창군으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315년(태조 4) - 견암사 왕씨를 위해 수륙제 거행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383년(우왕 9) - 정원보의 안집 사칭 사건 발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388년(우왕14) - 반전 왜구에게서 아버지 구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14년(태종 4) - 거제현과 거창현을 제창현으로 통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22년(세종 4) - 거제현이 가조에서 거제도로 돌아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92년(선조 25) - 문위, 변혼, 윤경남 등 의병 거병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36년(인조 14) - 정온 용산 범국회 결성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28년(영조 4) - 1728년 정희량의 정변 발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32년(영조 8) - 거창인들이 상경해 진휼을 청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99년(정조 23) - 거창현이 거창도호부로 승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19년(순조 19) - 정온의 위토 회복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38년(헌종 4) - 윤치광 거창 부사 이재가의 탐학 고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95년 - 거창 도호부에서 거창군으로 변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 가조·위천에서 3·1 운동 발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 곽종석 파리 장서 운동 주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7년 - 신간회 거창 지회 창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3년 - 1933년 대홍수 발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7월 27일 - 북한 인민군 거창 점령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8월 - 김용 마을 주민 학살 사건 발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1년 2월 -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발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7년 6월 - 거창 지역민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시위 전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6년 1월 -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 조치 법안 공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거창 사건 추모 공원 준공 |
[정의]
선사에서 현대에 이르는 거창의 역사.
[선사]
거창 지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던 자취를 남기고 있는 곳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거창 정장리 유적은 발굴 조사를 통해 석기 공방을 비롯해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 사람들은 생산 활동을 위하여 동물의 뼈나 뗀석기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무리를 지어 사냥감을 찾아다니면서 이동하는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거창 임불리 유적은 중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유적으로 주목받았다. 가는 덧무늬 토기[세선 융기문 토기(細線隆起紋土器)]와 빗살무늬 토기 등은 한반도의 선사 문화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합천댐 상류에 위치하는 남하면 대야리 유적에서는 신석기와 청동기 유적이 발굴 조사되어 거창 지역 선사인들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알려 주었다.
거창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고인돌 유적이 다량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적만 약 30여 곳 140여 기에 이른다. 이 가운데 거창 내오리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제65호]에서는 민무늬 토기와 돌살촉, 돌칼 등이 확인되었으며, 지석묘는 남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탁자식 고인돌로 주목받고 있다.
[고대]
다양한 고인돌 유적의 분포상, 고분 유적의 규모 등에 관한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통해 거창 지역에는 최소한 2~3세기 경 ‘국(國)’을 형성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기록을 통해 변한 12국 가운데 ‘고순시국(古淳是國)’이나 ‘감로국(甘路國)’ 등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거창 지역에서 국명이 분명한 최초의 국가로 ‘거열(居烈)’이 꼽힌다. 이는 우륵의 가야금 12곡 가운데도 보이고 있어 가야권에 속한 소국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이곳이 이전에 거열(居烈), 혹은 거타(居陁)라 불렸다고 하는 데서 신라로 편입된 이후 이 지역의 명칭이 변모되었음도 알 수 있다.
가야 연맹의 일원이 된 거창 지역은 외교 및 경제 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642년 백제 의자왕이 친히 군사를 일으켜 신라 서부 40여 개의 성을 장악하면서 마침내 대야성을 함락시킨 사건은, 오늘날 거창 지역에서 확인되는 이 시기의 성곽 유적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거창 지역은 562년 신라의 영토에 편입된 이후에도 백제권과 가까운 지역이었다. 이는 660년 백제가 신라에 항복한 이후에도 백제 부흥을 도모하는 세력들이 거열성을 중심으로 치열한 항쟁을 도모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663년(문무왕 3) 신라가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의 공격으로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는 기사가 이를 웅변하기 때문이다. 신라는 거창 지역을 장악한 이후 665년(문무왕 5) 거열주(居列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문무왕 5년 겨울 일선주(一善州)와 거열주민(居列州民)들을 동원하여 하서주(河西州)로 군자를 운반하게 하였다.”라는 내용은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의 처지와 모습을 엿보게 해 준다. 673년(문무왕 13)에는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을 쌓았다.
거열군은 757년(경덕왕 16) 거창군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이는 왕권 강화를 위한 경덕왕의 조치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신라 후기 거창 지역이 신라국의 중앙 집권적 지방 지배 구조에서 오늘날 서부 경상남도의 한 거점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925년(태조 8)에는 견훤(甄萱)이 거창군을 점령하기도 했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 거창 지역은 행정 구역상 거창현(居昌縣)·가조현(加祚縣)·감음현(感陰縣)·이안현(利安縣)·삼기현(三岐縣)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고려 전기까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가운데 향촌의 자치 활동에서 향리(鄕吏)들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 유학자 박유(朴儒)는 궁예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 남쪽으로 내려와 박유산에 머물렀다. 거창 출신의 희랑(希朗)은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이 쟁패를 겨루던 시기 해인사(海印寺)에 주지하면서 왕건의 귀의를 받았으며 전지(田地)를 시납(施納)받아 가람을 크게 중건하였다.
거창현은 1018년(현종 9) 합주(陜州)에 내속되었으며 1172년(명종 2) 지방관인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거창 지역은 향권(鄕權)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향리들의 경쟁이 치열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161년(의종 16) 자화(子和)와 의장(義莊)의 무고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원종 대 가조현은 거제현에 이속되었다. 1161년 부곡제(部曲制) 지역으로 강등된 감음현은 1390년(공양왕 2)에 현으로 회복되었으며 이안현을 그 관할에 두기도 하였다.
12세기와 13세기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던 시기였다. 거창 지역에는 1178년(명종 8) 2월 우거향(亏居鄕)에서 민가에서 쓰러진 배나무가 저절로 일어나 가지와 잎이 다시 살아나고, 같은 해 4월 이안현에서는 쓰러졌던 나무가 다시 일어나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3세기 후반 몽골과의 전쟁이 종식되는 과정에서 거창 지역은 내륙이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1270년(원종 11)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의 환도를 결정하자 이에 반기를 든 삼별초 세력이 남해도(南海島)와 거제도(巨濟島)를 장악한 가운데 거제도 사람들이 가조현으로 대거 들어와 살게[교유(僑寓)]된 것이다.
한편, 충정왕~공민왕 대에 집중적으로 출몰한 왜구들로 인해 고려 정부는 해방(海防) 정책의 일환으로 도서 지역의 치소를 내륙으로 옮기게 하였는데, 거제현과 그 속현인 아주현·송변현, 그리고 오양역이 가조현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4세기 왜구로 인한 피해는 거창 지역에도 극심하였다. 『고려사』에는 왜구에게 잡혀간 아버지를 구해 낸 반전(潘腆)의 사례가 기록되고 있고, ‘절부리(節婦里)’ 지명을 낳은 탐진 최씨의 이야기가 널리 전해 오고 있다. 1388년(우왕 14) 반전은 적진에서 아버지를 구출하였으며 최씨 부인은 왜적의 겁탈 위협에 죽음으로 맞서 저항한 인물이었다.
한편, 고려 말 혼란한 사회상을 틈타 안집(安集)을 사칭하며 재물을 축적하다 발각된 사례가 거창현에서 발각되었다. 1383년(우왕 9) 전직 낭장(郎將)인 정원보(鄭元甫)는 안집사를 사칭하며 재물을 축적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고을 수령을 사칭하면서 재물을 편취하는 고려 말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잘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조선 시대]
고려 말 사회 모순의 개혁을 주창하며 사전 혁파(私田革罷)와 과전법의 공포로 경제 기반을 구축한 개혁파 사대부들에 의해 1392년 7월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었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표방하는 중앙 집권적 양반 관료 국가였다.
건국 초 전국적인 행정 구역 개편이 단행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는데, 거창 지역은 거창현 전역, 이안현과 감음현이 합쳐진 안음현의 일부 지역, 삼기현과 가수현이 합쳐진 삼가현의 일부 지역으로 나뉘어 편제되어 있었다.
1395년(태조 4) 조선 정부는 거창 우두산의 견암사(見巖寺)에 고려 왕씨(王氏)를 위해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게 하였다. 견암사는 현재의 고견사로, 태조는 이곳에 전답 1백 결을 내려 매년 봄과 가을에 외로운 영혼들을 달래는 법회를 개최하도록 하였다.
1422년(세종 4) 가조현이 거창현의 속현이 되었고, 거제현이 가조(加祚)에서 거제도로 돌아갔다. 이에 앞서 고려 후기 거제현이 가조현에 들어와 살았는데, 1414년(태종 14) 거제현이 거창현과 합쳐져 제창현(濟昌縣)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415년(태종 15) 거창현과 거제현으로 환원되었다.
15~16세기 거창 지역에는 재지 사족(在地士族)이 형성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토성(土姓)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그 가운데 유씨(劉氏)는 고려 말 태조를 도와 개국 공신이 된 유한우(劉旱雨)를 비롯해 많은 출사자를 배출하였으며, 신씨(愼氏)는 다수의 관인(官人)을 배출하며 훈척(勳戚) 가문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1495년(연산군 1) 거창현이 거창군(居昌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다시 거창현으로 환원되었는데, 이는 모두 단경 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관향(貫鄕)이었기 때문이다.
거창 지역 토성의 활약은 성리학적 생활 규범이 정착되기 이전 남귀 여가혼(男歸女家婚)·자녀 균분 상속(子女均分相續)과 같은 가족 제도와 상속 제도의 영향도 작용하였는데, 이는 타 고을의 재지 사족들을 끌어들이는 요소로도 작용하였다.
15세기 후반은 훈구파(勳舊派)에 대항하는 사림파(士林派)가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대두하는 시기였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金宗直)의 조카 김수양(金粹讓)은 관직을 버리고 거창에 정착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거창 지역 인사들과의 교유가 잦았다.
특히 김굉필은 인접한 합천군 야로에 거주하면서 정여창과 함께 지금의 거창군 가조면 수포대(水瀑臺) 일원에서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사림파의 정치·학문적 명분을 계승한 많은 인사들이 거창에서 배출되었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사림들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어 갔고, 이 시기 거창 지역에서는 임훈(林薰)과 신권(愼權) 등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황(李滉)·조식(曺植)과 동년배로 서로 교유하며, 북상면의 갈천 서당(葛川書堂), 위천면의 요수 서당(樂水書堂)을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을 양성하였다.
이 무렵 이황은 1543년(중종 38) 장인 권질(權礩)이 머무르고 있던 거창의 영승(迎勝) 마을을 방문한 바 있으며, 진주·합천 일대에서 활동한 조식도 거창과 인접한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산청의 지곡사(智谷寺) 등에서 강론하였는데, 거창의 많은 사림들이 그로부터 학문을 배우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 지역은 경상우도 의병 활동의 중심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가복면 용산에 의병군의 진영(陣營)이 설치되었으며, 김면(金沔)의 휘하에 기병유사(起兵有司) 정유명(鄭惟明)을 비롯해 문위(文緯)·성팽년(成彭年)·변혼(卞渾)·윤경남(尹景男)·신수(愼守) 등이 인근의 의병과 합세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가운데 우현 전투는 대표적 사례였다. 우현은 일명 우척현(牛脊峴)으로 거창군과 경상북도 김천시 사이에 위치하는 고개인데, 일본군의 주요 진격로 가운데 하나였다. 이 전투는 김면 휘하의 의병과 거창 지역 산척(山尺)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낙동강의 수로 확보와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1636년 병자호란은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절개와 의리를 지킨 대표적 인물로 정온(鄭蘊)[1569~1641]이 있다. 정온은 청 태종이 황제를 칭하며 조선에 대하여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무력 응징을 요구하였고, 마침내 조선이 항복하자 낙향하여 덕유산(德裕山) 자락에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 한편, 1636년(인조 14) 정온(鄭薀)은 용산 범국회를 결성하였다.
조선 후기 거창 지역은 몇 차례의 큰 사건으로 인해 읍격(邑格)이 여러 차례 변동되었다. 1658년(효종 9) 거창현에서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강상(綱常)을 범한 고을이라 하여 현이 폐지되고 안음현과 일시적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660년(현종 1) 장의신(章義信)의 상소로 복구되었다.
1728년(영조 4) 3월 이른바 무신란(戊申亂)이 발발하였다. 이 사건은 안음현의 정희량(鄭希亮)이 주역이었으므로 ‘정희량의 난’으로도 불리었다. 경종이 갑자기 죽고 즉위한 영조 집권 초 정희량은 위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이인좌의 반란군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실패로 끝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안음현이 거창현과 함양군(咸陽郡)으로 분속되었으며 1736년 회복되었다. 1732년(영조 8) 거창인들이 상격해 진휼(賑恤)을 청원하였다. 1799년(정조 23) 거창현이 거창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19년(순조 19) 정온의 위토가 회복되었다.
19세기 세도가들이 득세하고 삼정(三政)이 문란한 가운데 봉건 사회의 여러 모순들이 노정되고 이에 민심은 저항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1838년(헌종 4) 거창 지역 지식인 윤치광은 「거창부 폐장」을 지어 거창 부사 이재가의 학정과 수탈을 고발하였는데, 이에 기초한 「거창가」는 1862년 전국적인 농민들의 봉기에도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근대]
1862년 전국적인 농민 항쟁이 전개된 이듬해 고종이 즉위하였고, 1871년에는 흥선 대원군에 의해 전국의 서원이 정리되었다. 거창에서는 포충사(褒忠祠)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서원이 철폐되었다. 1895년 전국 8도가 23부로 개편되자 거창도호부는 거창군이 되어 진주부에 속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듬 해 13도가 설치되면서 거창군·안의군·삼가군은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식민지화 작업을 강행하였다. 거창 지역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 활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의 활동은 1907~1908년 절정에 달하였는데 주된 공격 대상은 일본군, 일제 경찰, 일본인 등이었다.
북상면 월성 전투는 1907년 9월 덕유산 의병과 함께 일본군 및 관군을 상대로 벌였던 치열한 싸움이었다. 이후 고제면 궁항리에 기반을 둔 오진사(吳進士) 의병, 가북면 몽석 전투 등은 거창 지역이 의병 운동의 주요 무대임을 잘 보여 준다. 이들 의병은 1910년 감악산 연수사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항전을 이어 갔다. 1909년 객사 자리에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1910년 일제는 통치 체제를 개편하고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거창읍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각 면에 경찰 주재소를 두었으며, 거창 헌병 분대는 함양, 합천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1914년 거창의 행정 구역이 개편되었다. 기존의 거창군 지역에 마리, 위천, 북상, 그리고 신원 지역을 통합하여 현재와 비슷한 군의 범위가 정해지게 되었다.
일제의 지배와 수탈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1919년 3·1 운동이 폭발하였다. 거창의 3·1 운동은 특히 가조와 위천에서 격렬하였다. 가조에서는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거창읍으로 향하던 중 일본 군경과 충돌하였고,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5명이 구속되었다.
4월 8일 위천 장터에서는 주동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삽시간에 감격의 현장이 되었다. 시위대는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여 돌을 던지면서 “일본인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고, 일본 헌병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군중들을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들 시위는 모두 일제에 무력으로 맞선 투쟁이었다.
일제 강점기 파리 장서 운동, 이주환·윤봉의 열사의 자결은 거창 지역 유림(儒林)의 대표적 항일 운동이었다. 파리 장서(巴里長書)는 가북면 다전에 살고 있던 곽종석(郭鍾錫)이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고 전국의 유생 137명이 서명한 것으로, 유림들은 이를 가지고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평화 회의에 대한 독립을 청원하였다. 한편, 1927년에는 신간회 거창 지회가 창립되었다.
기독교계에서는 읍 교회를 중심으로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해 군자금 및 독립군 모집에 나서기도 하였다. 오형선(吳亨善)·주남선(朱南善) 등은 이와 함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고 『독립신문』을 가져와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불교계에서는 거창 출신의 승려 박달준·김봉률 등이 만세 운동과 독립군 자금 모집에 적극적이었다. 박달준은 해인사 앞에서 민중들을 모아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가북 출신 김봉률은 3·1 운동 후 만주에서 한족회 설립에 참여하였고 신흥 무관 학교를 졸업한 후 군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1930년대 일제는 대륙 침략을 시작하면서 농민에 대한 수탈과 지역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농민들은 소작 쟁의 등을 통해 저항하였으며, 일제는 경찰을 동원하여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 외에도 수해와 가뭄으로 어려움이 컸던 농민들은 사방 공사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만주 등지로 이주해 살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거창 사람들은 교육에도 많은 열정을 쏟고 있었다. 1909년 개화 인사들의 주도로 원명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지속적인 학교 설립 운동을 통해 1928년 거창 농립 보습 학교, 1944년 거창 공립 농업 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활동은 거창 지역이 교육과 문화의 고장으로 명성을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거창 사람들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가북 출신 전사옥(全駟玉)은 청년 단체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를 만났으며, 북상 출신 임유동(林有棟)은 한글학자 이극로와 함께 건국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거창 지역에서는 건국 준비 위원회 지부가 조직되었으며, 대한 독립 촉성국민회 등의 대중 조직이 해방 공간에서 활동하였다.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은 거창 지역민에게도 큰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전쟁 발발 두 달 뒤인 7월 27일 북한 인민군에게 점령되었으며, 미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1950년 8월 김용 마을 주민 학살 사건이 있었다. 1951년 2월에는 빨치산 토벌 작전을 전개하던 국군에 의해 총 719명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거창의 유권자들은 대거 민주당에 투표하였고 압도적인 지지로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 1987년 10월 27일 실시된 직선제 개헌 투표에서 거창 지역민들 대다수는 새 헌법에 찬성하며 민주주의를 지지하였다. 1987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통일 민주당 김영삼 후보가, 1988년 4월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통일 민주당 김동영 후보가 당선되었다.
거창 지역민들의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시위가 있었던 1987년 6월 항쟁 후 사회 민주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끊임없이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한 결과 1996년 1월 5일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 조치 법안’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2004년 4월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염원하며 거창 사건 추모 공원이 준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