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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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陸軍 第11師團 9聯隊 3大隊 |
영어공식명칭 | Army's 11th Division 9 Regiment 3rd Battal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광욱 |
[정의]
6·25전쟁 시기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인민군·빨치산 토벌 부대.
[개설]
육군 제11사단은 인천 상륙 작전 이후 패배한 인민군 및 빨치산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1950년 최덕신을 사단장으로 한 11사단은 예하에 세 개 연대를 배속받아 전라북도 남원에 사단 본부, 경상남도 진주에 9연대, 전라북도 전주에 13연대, 전라남도 광주에 20연대를 주둔시켰다.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9연대는 1948년 12월 29일까지 제주도 4·3사건 진압에서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입혔던 전력이 있던 부대로 1950년 9월 25일 11사단에 배속, 1950년 11월에 진주로 이동하여 지리산 지역 토벌 작전을 전담했다. 11사단 9연대는 1950년 말에서 1951년 1월까지 덕유산 자락의 북상면에 대한 소개 작전을 마치고 2월 초에 새로운 작전에 돌입하였다.
9연대 3대대는 9중대, 10중대, 11중대, 12중대 등 4개 중대와 수색 소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3대대의 작전 지역은 거창군 거창읍, 산청군 산청읍, 함양군 함양읍을 연결하는 삼각 지대 내부 지역으로, 여기에 포함된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거창군 신원면 등 세 개 지역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나게 된다.
신원면은 1950년 9월 27일 국군에 의해 거창읍이 수복된 후 11월 5일에 경찰이 복귀하였다. 인민군 점령 시기 신원면에서는 인민 위원회, 농민 위원회, 청년 동맹, 부녀 동맹 등이 조직되었으나 인민군에 의한 조직적 숙청은 없었다. 1950년 12월 5일 빨치산의 공격으로 신원면은 다시 미수복 지구가 되었다. 한동석 소령이 지회하는 제3대대는 1951년 2월 4일 거창 농림 고등학교에서 숙영을 하고 다음날 새벽 5시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1951년 2월 9일, 10일, 11일 3일 동안 신원면에서 11사단 3대대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의 수는 719명이었다. 2월 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 마을에서 84명, 2월 10일 신원면 대현리 탄량골에서 100명, 2월 11일 신원면 과정리 박산골에서 517명이, 그 밖의 지역에서 18명이 학살당했다. 이때 학살당한 사람은 15세 이하의 어린이가 362명, 여자가 391명으로 전체의 절반 이상이었고, 61세 이상의 노인이 64명이었다.
[설립 목적]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는 한반도 남부에 잔류한 인민군 패잔병 및 빨치산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변천]
1950년 부대 창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예비 사단으로 군사령부의 직할 부대 역할을 담당해 왔다. 2004년에는 보병 사단에서 기계화 보병 사단으로 재편되었다.
[의의와 평가]
인민군 잔존 세력 및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국가 폭력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