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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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 鄕案 謄載 24門中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어윤동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거창 향안』에 등재된 수많은 성씨의 사족(士族)들 중에서 향중(鄕中)에서 우선적으로 선정한 24개의 문중.
[개설]
조선 시대에는 고을마다 유향소가 있어 고을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아전들을 감찰하며 민의를 대변하였다. 이 유향소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덕행과 학문으로 인정을 받은 선비들이었는데, 그 선비들의 명부가 향안(鄕案)이다.
『거창 향안(居昌鄕案)』에 실린 선비의 숫자가 1,783명이며, 30개 성자(姓字)에 45개 관향(貫鄕)[관향이 표시되지 않은 경우도 많음]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24개 문중을 선정했으니, 등재된 순서를 보면 신(慎)[居昌], 오(吳)[咸陽], 형(邢)[晋陽], 허(許)[河陽], 이(李)[星州], 유(柳)[文化], 이(李)[延安], 김(金)[善山], 정(鄭)[東萊], 문(文)[南平], 이(李)[完山; 全州], 변(卞)[密城; 密陽], 윤(尹)[坡平], 이(李)[碧珍], 이(李)[德水], 이(李)[河濱], 어(魚)[咸從], 김(金)[商山], 표(表)[新昌], 최(崔)[興海], 조(趙)[漢陽], 정(鄭)[晋陽], 박(朴)[密陽], 강(姜)[晋陽]이다.
거창 신씨의 경우 4개파가 들어 있으며, 전주 이씨도 양녕 대군(讓寧大君)·효령 대군(孝寧大君)·완원군(完原君) 등 3개파가 있으며, 선산 김씨도 3개파가 들어 있다.
[연원]
흥성 장씨(興城張氏)가 초기에는 많이 등재되었으나 무신년(戊申年)[1728] 이후에는 겨우 3명만이 등재되었고, 죽산 전씨(竹山全氏)의 경우는 전팔고(全八顧)와 전팔급(全八及) 같은 유현(儒賢)이 있었는데도 1명도 등재되지 않아 이해가 되지 않으나, 무신(戊申) 이후에는 많이 등재되었다.
회산(晦汕) 전병식(全秉湜)의 유고에 의하면 1945년도에 죽산 전씨를 비롯하여 8개 문중을 추가 영입하여 32개 문중으로 하기로 합의했는데, 1947년 정월 그믐에 용천 정사(龍泉精舍)의 향원(鄕員) 모임에서 다시 탈퇴시켜 24문중으로 고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을마다 향안에 등재된 대표 문중을 선정했다. 이웃 안의는 18개 문중이 선정되었는데, 대부분이 지금 거창의 원학동인 북상·위천·마리 3개면의 출신으로 지금까지 안의 향교의 주도권은 거창의 원학동 계곡에서 주도하는 셈이다[과거 삼가 향교에 속했던 신원면은 거창 향교에 출입하기로 했으나, 원학동 3개면은 안의 향교를 떠날 수 없는 입장이다].
[입향 경위]
거창 신씨는 개성에 세거(世居)하다가 8세인 검교공(檢校公)[신성(慎成)]이 남하하여 1260년에 거창에 터를 잡았고, 15세의 10종반들이 거창에서 태어났다.
함양 오씨·진양 형씨·하양 허씨·성주 이씨는 조선 초기에 입향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임진왜란 이전에 거창에 입향했으며, 한양 조씨·진양 강씨·밀양 박씨는 임진왜란 이후에 거창으로 입향하였다.
[현황]
거창 향안에 마지막 기록이 있었던 기미(己未)[1739]부터 만 4주갑(周甲)되던 기미(己未)[1979]에 24문중 후손들이 후손록을 작성하여 향안 뒤에 실었다. 선조들의 뜻을 잇기 위해 해마다 모임을 갖고 있다.
[관련 유적]
24문중별로 많은 유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