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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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惟明 |
영어공식명칭 | Jung Yumyeong |
이칭/별칭 | 극윤(克允),역양(嶧陽)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39년 - 정유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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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정유명 진사시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96년 - 정유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35년 - 정유명 역천사 배향 |
거주|이주지 | 정유명 거주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
묘소|단소 | 정유명 묘소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
사당|배향지 | 역천사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초계 |
대표 관직|경력 | 진사 |
[정의]
조선 전기 거창 출신의 학자.
[가계]
정유명(鄭惟明)[1539~1596]의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극윤(克允), 호는 역양(嶧陽)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지낸 정종아(鄭從雅)이며, 할아버지는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지낸 정옥견(鄭玉堅)이다. 아버지는 진용교위(進勇校尉) 정숙(鄭淑), 어머니는 부사용(副司勇)을 지낸 정순(鄭純)의 딸 진주 정씨(晋州鄭氏)이다. 정유명의 부인은 장사랑(將仕郎) 강근우(姜謹友)의 딸 진주 강씨(晉州姜氏)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특히 차남 정온(鄭蘊)이 현달하였다.
[활동 사항]
정유명은 같은 고을 출신인 임훈(林薰)의 대표적인 제자이며, 노진(盧禛)의 문하에서도 학문을 배웠다. 1566년(명종 21)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노진 등이 여러 문생(門生)들과 지곡사(智谷寺)[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소재]에 모여 여러 날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정유명도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1573년(선조 6)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나, 어머니의 노환이 심해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힘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정유명은 김면(金沔)을 도와 왜적을 물리쳤으며, 안음현의 기병 유사(起兵有司)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전란이 진행되던 중 경상우도 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 김성일(金誠一)이 경상좌도 관찰사(慶尙左道觀察使)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자 경상우도의 많은 유생들이 김성일을 머무르게 해 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때 정유명은 거창(居昌)·안음·산음(山陰)·함양(咸陽)의 소두(疏頭)[연명하여 올리는 상소에서 맨 먼저 이름을 올린 사람]가 되었다.
1595년(선조 28) 조정에서 몇 가지 조목으로 인재를 널리 뽑자, 정유명이 효우(孝友) 과목 맨 앞에 들었으나, 조정에서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 임금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안음 현감 곽준(郭䞭)이 정유명의 행실을 적어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에게 보고하였으나, 사양하는 글을 써서 피하였다.
[묘소]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성산(城山)에 정유명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정유명은 사후에 가선대부 이조 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1635년(인조 13) 임득번(林得蕃)과 함께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건립되었던 역천사(嶧川祠)에 배향되었다. 역천사는 흥선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