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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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薰 |
영어공식명칭 | Lim Hun |
이칭/별칭 | 중성(仲成),갈천(葛川),자이당(自怡堂),고사옹(枯査翁),효간공(孝簡公)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00년 - 임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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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40년 - 임훈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53년 - 임훈 관천 |
활동 시기/일시 | 1553년 - 임훈 사직서 참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54년 - 임훈 집경전 참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55년 - 임훈 제용감 참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64년 - 임훈 효행으로 정려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 임훈 경명행수로 천거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 임훈 언양 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69년 - 임훈 군자금 주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69년 - 임훈 비안 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임훈 지례 현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임훈 종묘서 영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임훈 장악원 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임훈 갈천 서당 건립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임훈 광주 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임훈 장예원 판결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584년 - 임훈 몰 |
추모 시기/일시 | 1586년 - 임훈 용문 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662년 - 임훈 용문 서원 사액 |
추모 시기/일시 | 1859년 - 임훈 가선대부 이조 참판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860년 - 임훈 자헌대부 이조 판서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871년 - 임훈 효간 증시 |
출생지 | 임훈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
수학|강학지 | 갈천 서당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
묘소|단소 | 빈동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
사당|배향지 | 용문 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
사당|배향지 | 거창 갈계리 은진 임씨 정려각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은진 |
대표 관직|경력 | 광주 목사 |
[정의]
조선 전기 거창 출신의 문신.
[가계]
임훈(林薰)[1500~1584]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字)는 중성(仲成), 호(號)는 갈천(葛川)·자이당(自怡堂)·고사옹(枯査翁),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임득번(林得蕃), 어머니는 참봉(參奉)을 지낸 강수경(姜壽卿)의 딸 의인(宜人) 진주 강씨(晉州姜氏), 할아버지는 사용(司勇)을 지낸 임자휴(林自庥), 증조할아버지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지낸 임천년(林千年)이며, 임훈의 부인은 진사(進士) 유환(兪瑍)의 딸 정부인(貞夫人) 고령 유씨(高靈兪氏)다. 동생인 임영(林英)·임운(林芸)과 함께 현달하였다.
[활동 사항]
임훈은 1500년(연산군 6)에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해당하는 경상도 안음현 갈천동(葛川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버지 임득번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동생 임운과 함께 정여창(鄭汝昌)을 사숙하였다. 성장해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남명(南冥) 조식(曺植) 등 당대의 명현들과 교유하였다.
1540년(중종 35)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으며, 1553년(명종 8) 관천(館薦)[성균관에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할 사람을 추천하던 일]으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임명되었다. 1554년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에 이어, 1555년에는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또 같은 해 전생서 참봉(典牲暑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61년(명종 16) 아버지 임득번이 세상을 떠나자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3년 간 시묘(侍墓)를 정성껏 치렀다. 이러한 효행으로 인해, 임훈은 동생 임운과 함께 1564년(명종 19) 관찰사의 추천으로 고향에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졌다.
1566년(명종 21) 임금이 생원·진사 중 육조(六條)가 구비된 인물을 천거하라고 명하였다. 이로 인해 이조에서는 임훈을 비롯해 이항(李恒)·성운(成運)·한수(韓脩)·남언경(南彦經)·김범(金範) 등 6인을 ‘경명 행수(經明行修)[경전에 밝고 행실이 닦임]’한 인물로 천거하였다. 임금은 6인 모두를 6품으로 올려주었다. 임훈은 그해 8월 언양 현감(彦陽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부름을 받고 올라오는 도중에 병을 얻자, 임금이 내의원(內醫院)으로 하여금 약을 지어 보내게 하고, 병중에 먹을 만한 음식물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9월, 임훈은 한수·이항·남언경과 함께 사정전(思政殿)에서 임금을 배알하였다. 이 자리에서 임금은 치도(治道)에 대해 물었는데, 임훈은 ‘정심 수신(正心修身)’[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일]으로 대답하였다. 이에 임금은 4인에게 술을 내려 주었다. 1567년 임금이 천재지변으로 여러 신하에게 바른 말을 널리 구하자 임훈은 언양현(彦陽縣)의 여섯 가지 폐단을 아뢰었다.
1569년(선조 2)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비안 현감(比安縣監)으로 부임하였고, 계(啓)를 올려 퇴계 이황을 곁에 두라고 건의하였다. 1573년(선조 6) 지례 현감(知禮縣監), 종묘서 영(宗廟署令),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으로 나가지 않고, 고향에 갈천 서당(葛川書堂)[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소재,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95호]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였다. 광주 목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에 전라도 관찰사 박민헌(朴民獻)이 서장(書狀)을 올려, 임훈에 대해 “공렴(公廉)하고 결백하므로 백성들이 빙호(氷壺)[청렴하고 청백함]라고 지목하면서, 오직 오래 유임하지 않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1582년(선조 15)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올랐으나, 병환으로 모두 사직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4권 2책의 『갈천집(葛川集)』이 전한다.
[묘소]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빈동(殯洞)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임훈은 1561년 동생 임운과 함께 효행으로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졌다. 해당 정려문은 임훈의 고가(古家)가 있는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있다. 현재 임훈의 정려는 ‘거창 갈계리 은진 임씨 정려각(居昌葛溪里恩津林氏旌閭閣)[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34호]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이후 정려된 후손의 4위가 같이 모셔져 있다.
1859년(철종 10) 가선대부 이조 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에 증직되었고, 1860년(철종 11)에는 자헌대부 이조 판서(資憲大夫 吏曹 判書)로 증직되었다. 이어 1871년(고종 8)에는 효간(孝簡)으로 증시(贈諡)되었다.
1586년(선조 19) 용문 서원(龍門書院)에 배향되었다. 용문서원은 옛 경상도 안음현이었던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에 1582년(선조 15) 건립된 서원이다. 처음에는 정여창만 배향하였으나, 1586년 임훈·임운 형제가 추가 배향되었으며, 1642년(인조 20)에는 정온(鄭蘊)이 배향되었다. 용문 서원은 1662년(현종 3) 사액이 내려졌지만, 흥선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