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25 |
---|---|
한자 | 政治 |
영어음역 | Jeongchi |
영어의미역 | Politics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채장수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지역민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총체적 활동.
[개설]
현대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정치는 해방 후 대의제를 근간으로 자유 민주주의가 형성된 이후를 의미하며, 김천의 정치 역시 제1공화국의 등장 이후 지역 외적인 영역[중앙 정치]과 지역 내적인 영역[지방 자치]의 결합으로 전개되고 있다.
[변천]
김천에는 해방 직후 1945년 8월 18일 김천극장에서 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가 결성되었으나 이념 대립으로 소멸되었고, 이후 청년회와 청년동맹이 결성되어 대립하였다. 이외에도 민주애국청년동맹, 대동청년단 김천지부 등이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자유당이 여당이었고 민주당이 야당이었던 이승만 정부 시기, 김천에서는 1952년 10월 26일 자유당 김천·금릉지구당이 결성되었으며, 민주당은 고전을 겪으면서 1956년 4월 20일에야 민주당 김천시당과 금릉군당을 급조하였다. 이외에도 당시 김천 지역에는 친자유당 조직인 대한청년단, 민보단, 방공단의 김천 지역 조직체가 결성되어 있었다. 이 당시에 김천에서는 아직 정당, 의회 등 현대적 정치 체계가 정착되지 않아서인지 정상적인 정치 과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단명한 내각제의 장면 정부 시기 민주당이 여당으로 등장하였다. 한편 김천 지역의 지구당 조직과 활동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금릉군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이 5명 출마한 것으로 보아서 김천 지역에서도 민주당 신구파 사이의 갈등이 강하게 표출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5·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박정희 정부의 제3공화국 시기, 여당인 공화당의 강력한 지배가 당분간 지속되었다. 김천 지역에는 공화당 김천시당이 1963년 2월 11일에 창당하였으며, 지역 야당은 창당과 합당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민정당 김천·금릉지구당, 국민의당 김천·금릉지구당, 민주당 김천·금릉지구당, 민중당 김천·금릉지구당을 거치면서, 1968년 3월 26일에 신민당 김천·금릉지구당을 결성하였다. 당시 김천에 있던 군소 정당의 지구당으로는 신정당, 통한당, 보수당, 자민당, 신민회 등이 있었다. 이 당시에 김천의 정치적 성향은 영남 지역 기반인 보수 여당인 공화당에 대한 지지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정치적 자유가 상당 부분 위축된 제4공화국 시기 여당의 지위는 여전히 공화당이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유신 헌법 규정에 따라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과 국회의원 1/3을 선출하는 등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김천 지역에는 공화당 김천지구당이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다만 1972년 유신 체제의 성립으로 국회의원 선거구가 중선거구로 변하게 됨으로써 김천 지역의 공화당 지구당도 상주군과 통합되어 경북 제5지구당이 되었다.
지역 야당인 신민당 김천지구당도 상주군과 통합하여 재편되었으며, 이외에도 민주통일당 김천지구당이 생겨났다. 한편 공화당에 대한 김천 시민의 민심 이반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임에도 불구하고 김천 지역에서는 공화당 후보가 모두 낙선하였다.
12·12군사반란과 1980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등장한 전두환 정부 시기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 선거에 의해서 당선되었으며,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 등이 창당되었다. 김천 지역의 지구당은 여당인 민주정의당 김천지구당이 1980년 12월 24일 창당하였다. 야당으로는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 등이 김천과 금릉, 상주를 관할하는 지구당을 만들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하여 노태우 정부가 등장하였다. 당시 여당은 여전히 민주정의당이었다. 야당으로는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있었지만 이중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은 1990년에 민주정의당과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변화하였다.
이후 통합민주당[평화민주당의 후신]과 통일국민당이 등장하였다. 이외에도 진보적 야당으로 한겨레민주당과 민중당이 있었다. 당시 김천은 여당인 민주정의당 김천·금릉지구당이 1988년 4월 3일에 창립되어서, 1990년 4월 13일 민주자유당 김천·금릉지구당으로 개칭하였다. 김천·금릉 지역의 야당 지구당으로는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등이 있었다. 이 당시 김천의 정치적 성향은 영남 지역 기반인 보수 여당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로 나타났다.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정부는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등장하였는데 이후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으며 이것은 다시 한나라당으로 바뀌었다. 2012년 2월에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하였다. 야당도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국민신당 등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1995년 김천은 김천시와 금릉군이 김천시로 통합되는데 여당인 민주자유당 김천·금릉지구당이 1990년 4월 13일에 창립되어서, 1997년 11월 24일 한나라당 김천시지구당으로 개칭하였다. 야당 지구당으로는 민주당, 통일국민당, 자유민주연합, 새정치국민회의 등이 존재하였다. 이 당시에도 김천의 정치적 성향은 영남 기반의 보수 여당인 신한국당에 대한 일관된 지지를 보여주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선거에 의한 여야 간 정권 교체로 1998년에 등장한 김대중 정부 시기의 여당은 새정치국민회의였으며 이것은 이후 새천년민주당, 민주당 등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야당은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대표적이며 2000년에는 보다 진보적인 야당인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당시 김천에는 야당인 한나라당의 득세 속에서 여당과 야당의 지역 지구당이 존재하였다. 이처럼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한나라당이 야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천 지역의 지지는 여전하였다. 예를 들면,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천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 후보[총 득표수 9385]보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총 득표수 5만 5676]를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는 김천 지역에 영호남의 지역 대립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민주당은 집권 연장에 성공하여 노무현 정부가 탄생하였다. 이 당시 여당은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2003]으로, 다시 민주당으로 변경[2008]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야당으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후 재차 여당이 됨], 민주노동당 등이 있었다. 당시 김천에는 야당인 한나라당의 우세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여당과 야당의 지역 지구당이 설치되었다가, 2004년 3월 지구당이 폐지되면서 각 당의 김천 조직은 당원협의회로 개편되었다.
2008년 등장한 이명박 정부 시기의 여당은 10년 동안의 야당 생활을 접은 한나라당이다. 유력한 야당으로는 민주당이 있으며 이외에도 자유선진당과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등의 군소 정당이 있다. 꾸준하게 영남 지역 기반의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있던 김천에는 여당인 한나라당과 각 야당의 당원협의회가 존재하고 있다.
[현황]
2010년 현재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고 있으며 여당은 한나라당이다. 야당으로는 민주당을 비롯하여 군소 정당으로서는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등이 있으며, 김천에는 이러한 정당들의 당원협의회가 각각 설치되어 활동하고 있다. 최근 한나라당 김천시 당원협의회에서는 운영위원장[이철우 의원]을 만장일치로 선출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고 있다.
김천의 정치 지형은 1980년대부터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영남 지역 기반의 보수 정당에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표명하고 있으며, 현재 지역에서는 한나라당에 대적할 정도의 정당이나 사회 운동 단체가 존재하지 않는 편이다.
[의의와 평가]
김천 시민의 공적인 의사와 정책을 결정하는 권력적 활동으로서 김천의 정치는 보다 민주화되고 다원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