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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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選擧 |
영어음역 | Seongeo |
영어의미역 | Election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채장수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선거권을 가진 지역 주민이 공직에 임할 사람을 투표로 선출하는 일.
[개설]
선거는 해방 후 대의제가 등장하면서 일상화된 주민의 의사 결정 방식이다. 김천에서도 1946년 10월 입법 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기적으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 선거 등을 실시해 오고 있다.
[변천]
김천 지역 최초의 선거는 미군정의 방침에 따라서 1946년 10월에 시행된 입법 의원 선거이다. 이 선거는 우리나라에서 실시한 최초의 근대적 선거로 직접·보통·비밀·무기명에 의한 기호 투표로 진행되었다. 선거권은 23세 이상으로, 피선거권은 25세 이상으로 했으나 일제 강점기 당시 고급 관리나 법 고문을 지낸 자나 반민족행위자는 피선거권을 제한하였다.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제1공화국 시기에 김천에서는 4차례의 대통령 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와 2차례의 지방 선거가 이루어졌는데, 아직 정당 정치가 정착되지 않아서인지 선거에서 일정한 정당 지지 패턴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각제인 장면(張勉) 정부의 제2공화국 시기에 김천에서는 제5대 민의원·참의원 선거와 제3차 지방 선거가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일정한 정당 지지 패턴은 나타나지 않았고 민의원은 모두 무소속이 당선되었다.
박정희(朴正熙) 정부의 제3공화국 시기에 김천에서는 3차례의 대통령 선거[제5대·제7대] 및 국회의원 선거[제6대·제8대]가 이루어졌으나, 지방자치제도의 사실상 폐지로 지방 선거는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선거 결과 여당인 공화당에 대한 지지가 상대적으로 강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제4공화국 시기에는 유신 헌법 규정에 따라서 국민이 직접 선거로 뽑은 대의원으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⅓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와 더불어 김천에서는 두 차례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와 두 차례의 국회의원 선거[제9대·제10대]가 이루어졌다. 당시 김천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여당인 공화당 후보가 1973년 제9대 선거에서는 많은 지지로 당선되었으나, 1978년 제10대 선거에서는 두 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낙선하였다.
전두환(全斗煥) 정부의 제5공화국 시기에는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김천에서는 1차례의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와 2차례[제11대·제12대]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제11대는 민정당과 무소속 후보가, 제12대는 민정당과 신민당 후보가 각각 당선되었다.
대통령직선제의 부활과 더불어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경우 김천에서는 여당 후보인 노태우(盧泰愚)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소선거구제로 실시된 제13대·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여당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 한편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도의 부활로 김천에서도 제4대 지방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경상북도 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여당 후보들이 석권하였다. 김천시 의회 의원 선거 및 금릉군 의회 선거도 동시에 치러졌으나 정당 공천제가 아니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등장하였다. 당시 대통령 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천[1995년에 김천시와 금릉군이 김천시로 통합]은 여당에 대한 일관된 지지를 보여주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후보인 김영삼이 압도적인 지지를 획득했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여당 후보가 무난히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5년에 실시된 지방 선거에서는 경상북도지사의 경우 야당인 자유민주연합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김천 지역 최다 득표자가 되었으며, 김천시장은 여당 성향이었지만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5대 경상북도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이 5석을, 야당인 민주당이 1석을 각각 차지하였다. 김천시 의회 의원 선거도 함께 치러졌으나 정당 공천제가 아니었다.
1997년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천의 총 투표자수는 8만 7147명이었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金大中) 후보[총 득표수 9,385표]보다는 한나라당의 이회창(李會昌) 후보에게 5만 5676표로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1998년의 지방 선거도, 광역 단체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지지가 이어졌으며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동시에 치러진 광역의회 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2석을 모두 차지하였다. 기초의회 의원 선거도 함께 치러졌으나 정당 공천제가 아니었다. 한편 2000년의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가 여유 있게 당선되었다.
2002년의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총 8만 907표 중 6만 1638표를 획득하여 당선자였던 여당의 노무현(盧武鉉) 후보[1만 4925표]를 압도하였다. 2002년의 지방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강세를 보였다. 광역 단체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총 7만 1347표 중 5만 9870표를 획득했으며 광역의회 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2석을 모두 차지하였다. 그러나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었다. 기초의회 의원 선거도 함께 치러졌으나 정당 공천제가 아니었다.
2004년의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의 강세가 이어져 승리했으며, 여당인 열린우리당 후보는 10%를 조금 넘게 득표하여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2006년 제4회 지방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의 강세는 이어졌다. 광역 단체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81.3%라는 압도적 득표로 다시 선출되었으며,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가 50.1%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광역의회 의원 선거에서도 지역구 2석 모두를 한나라당이 차지했으며 정당 공천제로 실시된 기초의회 의원 선거에서도 지역구 의석 16석 중 한나라당이 10석을 차지하였다.
2007년의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李明博) 후보의 김천 득표율은 68.54%를 기록했으며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철우(李喆雨) 후보가 53.37%로 당선되었다. 2010년 제5회 지방 선거 광역 단체장 선거에서는 78.66%에 이르는 김천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한나라당 후보가 3선에 성공하였다. 기초 단체장 선거도 한나라당 후보가 69.78%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광역의회 의원선거에서도 지역구 2석 모두 한나라당이 차지했으며 기초의회 의원 선거에서도 지역구 15석 중 한나라당이 11석을 차지하면서 강세를 이어갔다. 교육감 선거와 교육위원 선거도 동시에 치러졌으나 정당 공천제가 아니었다.
[현황]
2010년 현재 김천은 2006년 제4회 지방 선거를 통하여 당선된 박보생(朴寶生) 시장이 제5회 지방 선거[2010년 10월]에서 재선에 성공하여 시정을 이끌고 있다. 또한 제5회 지방 선거를 통해 선출된 2명의 광역 의원과 총 17명[지역구 15석, 비례 2석]의 기초 의원이 활동하고 있다. 김천의 투표 성향은 박정희 정부 등장 이후 지역주의적인 경향과 함께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재까지도 김천은 공화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영남 지역 기반의 보수 정당에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지속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선거 결과를 보면 김천은 특정 정당에 일방적인 지지를 보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정치적 다양성과 지방 행정부와 지방의회 간 건전한 긴장 관계를 위해서 김천시민의 성찰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