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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174
한자 帝釋里
영어음역 Jeseok-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제석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 1월 1일연표보기
변천 1995년 3월 1일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5.09㎢
가구수 294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653명(남자 337명, 여자 316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마을 뒷산인 제석봉(帝錫峰)의 이름을 따서 제석동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개령군 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동촌(東村)·남촌(南村)이 통합되어 김천군 아포면 제석동이 되었고, 1949년 금릉군 아포면 제석동이 되었다. 1971년 동촌이 제석1동, 남촌이 제석2동로 분동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제석리가 되었고, 1995년 1월 1일 김천시 아포면 제석리가 되었다. 1995년 3월 1일 아포읍으로 승격되어 김천시 아포읍 제석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동남쪽에 제석봉과 국사봉이 연이어 솟아 있고, 서쪽으로 연봉천이 흐른다. 북쪽은 제석평야가 펼쳐져 있다.

[현황]

제석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5.09㎢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94세대에 653명(남자 337명, 여자 31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대성리, 남쪽으로 남면, 동쪽으로 국사리, 서쪽으로 봉산리, 북쪽으로 의리와 이웃하고 있다. 제석1리·제석2리·제석3리 세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반남 박씨·김해 김씨·진양 정씨 집성촌이다. 자연 마을로 동촌·남촌·진등 등이 있다. 마을 전면으로 드넓은 평야지 펼쳐진 김천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이며, 밭이 많아 사과 주산지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문화 유적으로 진주 정씨 공덕비, 제석리 고탑군 등이 있다.

제석2리에 속하는 남촌은 약 400년 전 진주에서 정택(鄭澤)이라는 선비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까마귀가 많이 산다 하여 오금리(烏金里)라고도 하였다. 예부터 교통의 요지로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으로 알려져 마을 입구의 패구나무걸은 길손들이 쉬어가는 장소로 유명했다.

제석리에는 삼한 시대 국가설과 역모를 꾀하다 처형된 길운절(吉雲節)과 관련된 길지(吉池)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제석리는 삼한 시대 성립한 아포국의 도읍으로 추정되는데 마을 뒷산인 관리봉(官吏峰)과 제석봉, 왕자의 태(胎)를 묻었다는 삼태봉(三胎峰) 등지에서 관련 정황이 발견되고 있다. 사서에도 “반란을 한 아포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 30명을 동원하였으나 감천 냇물이 불어 되돌아왔다[牙浦叛大發三十夜度甘川水見漲而退].”라는 기록이 있다. 아포가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감문국과는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손 치더라도 일대의 드넓은 평야를 기반으로 일정 형태의 소국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길지는 1600년(선조 33) 제석리 출신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처남 소덕유와 역모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한 길운절이 태어난 집터이다. 당시의 정황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제석리에서 태어난 길운절은 심성이 곱지 못하여 마을에서 쫓겨나 선산에 살고 있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난 때 연좌제로 몰린 정여립의 사촌 처남 소덕유가 중으로 변장하고 선산에 있는 길운절의 집에 유숙하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제주도로 가서 난을 일으키기로 했으나 중간에 난이 성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감한 길운절이 관에 고변(告變)[반역 행위를 고발함]하여 계획은 실패하였다.

고변을 한 길운절의 처분을 두고 수 개월간 어전회의가 열렸고, 결국 길운절에게는 고변의 공을 인정해 능지처참하되 연좌적몰(連坐籍沒)만은 면하게 하였고 길운절이 태어난 집은 법에 따라 헐어서 못을 팠으니, 그것이 곧 길지이다. 당시 길운절의 출생지가 선산으로 잘못 알려져 선산이 현으로 강등되는 등 애꿎은 화를 입기도 하였는데, 추후 선산이 아니라 개령현 제석동으로 밝혀지면서 선산은 환원되고 개령현은 폐현되어 김산군에 병합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18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연좌적몰(緣坐籍沒)만은 면하게 하였고 ->연좌적몰(連坐籍沒)만은 면하게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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