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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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草谷里 |
영어음역 | Chogok-ri |
이칭/별칭 | 초실,샐,세실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초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일대에 억새풀이 많아 초곡(草谷) 또는 초실(草室)이라 하였다. 우리말로는 샐 또는 세실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과거 김천 지역에서 사투리로 억새풀을 새 또는 샐이라고 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개령군 적현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초곡·서원이 통합되어 김천군 남면 초곡동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금릉군 남면 초곡동으로 개칭하였고, 1971년 초곡이 초곡1동, 서원이 초곡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초곡리가 되었으며, 1995년 김천시 남면 초곡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동쪽에 비봉산(飛鳳山)이 솟아 있고, 서쪽은 율곡천이 북쪽으로 흘러 감천으로 흘러든다.
[현황]
초곡리는 남면 최북단에 자리 잡은 마을로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4㎞ 떨어져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4.26㎢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51세대에 299명(남자 149명, 여자 15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서쪽으로 감천을 사이에 두고 개령면 황계리·서부리, 북쪽으로 비봉산을 사이에 두고 아포읍 대신리와 이웃하고 있다. 초곡1리·초곡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김해 김씨·김녕 김씨·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김천~구미 간 지방도, 경부선철도, 경부고속국도가 마을을 지나고 감천과 율곡천 변에 농경지가 발달해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포도 재배도 성하다.
문화 유적으로는 1697년(숙종 23) 창건되어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정경세(鄭經世)를 배향한 덕림서원(德林書院)이 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1차 서원철폐령 때는 훼철을 면했으나 1871년 2차 철폐령으로 헐리어 강당만 남았다가 1940년대 그마저도 붕괴되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
자연 마을로는 초곡, 서원이 있다. 비봉산 아래에 자리한 초곡은 김해 김씨 김제두(金漈斗)가 숙종 때 감문면 태촌리에서 이주한 이래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은 봉황새가 날아올랐다 하여 비봉산이라 한다. 나라에 급변이 있을 때 봉화를 올렸던 봉수대가 있었다 하여 봉화산(烽火山), 헤어졌던 벗을 만나는 산이라 하여 봉우산(逢友山)으로도 불린다.
비봉산 뒷골 속칭 큰까끔으로 오르다 보면 능선에 집채만한 왕바위가 솟아 있는데, 이 마을에서 번성했던 흥양 이씨의 무덤과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흥양 이씨 가문은 부마를 배출하며 크게 번성했는데 마을 뒷골에 있던 사찰과 승려들을 박대해 절이 폐사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한 승려가 이 집에 찾아와 집안이 더욱 번성하자면 부마 산소로 불리는 조상 산소에서 왕바위가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 집안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왕바위를 가리기 위해 흙을 쌓다가 여의치 않자 아예 석수를 불러다 왕바위를 깨뜨렸다. 그러자 갈라진 바위틈으로 금빛 새가 날아오르더니 어디인가로 날아가 버렸고 이후 집안이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실제로 바위에 구멍을 뚫었던 흔적과 바위가 칼로 자른 듯 갈라져 있고 금빛 새가 날아올랐다는 구멍도 볼 수 있는데, 일제 강점기까지 비봉산 자락에 유명한 금광(金鑛)이 있었다는 사실과 이 전설이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서원은 예전에 덕림서원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