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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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 時代 |
영어음역 | Joseon Sidae |
영어의미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김천 지역의 역사.
[개설]
고려 시대의 경우 지방에는 대체로 520여 개의 군현이 존재하였다. 그렇지만 고려 시대의 경우 수령이 파견된 주읍은 130여 개에 불과하고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군현은 속읍이라 하여 주읍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군현에 소속된 향·소·부곡·처·장이라고 부르는 부곡제 영역이 현재 확인된 것만도 900여 개 이상이었다. 고려 시대 주-속읍제를 근간으로 하는 5도 양계제의 지방 행정 체계는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8도 체제로 재편되면서 군현의 통폐합과 향·소·부곡·처·장의 직촌화가 이루어져 330여 개 정도의 군현으로 재편되고, 이들 읍에는 수령이 파견되었고, 군현의 하부 단위로서의 면리제를 시행하였다. 그 틀은 현재의 김천 지역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고려 시대의 경우 김천 지역에 해당하는 김산현(金山縣)·지례현(知禮縣)과 개령군(開寧郡), 어모현(禦侮縣)의 경우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읍이었다. 그러다가 1172년(명종 2) 개령군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고, 1390년(공양왕 2) 지례현과 김산현에도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자 김천 지역은 감무 대신에 정식 수령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김산현 관내에 정종(定宗)의 태가 묻혔다 하여 김산군으로 승격되면서 어모현을 통합하였다. 김산은 별호를 금릉(金陵)이라고 하였다. 1413년(태종 13) 개령군은 개령현으로 강등되어 현감이 파견되고, 지례현에도 현감이 파견되었다. 고려 후기 이후 속읍 지역 농업의 발달 과정에서 김천의 경우도 토지가 비옥해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였다. 그에 따라 여러 개의 제언(堤堰)이 축조되는 등 물산이 풍부해져 감무가 파견되고, 조선조에서 일읍으로서의 위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군현 제도의 변화]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김산현·지례현과 개령군이 수령이 파견되는 일읍으로의 위세를 갖추었지만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붕당의 다툼에 휘말리거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군현의 위세가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김산군의 경우, 1631년(인조 9)에 양석천(梁錫天)이 당파 싸움에 휘말려 상소를 하였다가 반역죄로 몰려 김산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김산현은 1640(인조 18)에 다시 군으로 복구되었다.
개령현의 경우, 1601년(선조 34)의 길운절(吉云節) 역모 사건으로 인해 길운절의 출생지인 개령이 폐현되어 김산군에 병합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이유림 등의 유생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복현되었다. 갑오경장이 단행된 이듬해인 1895년(고종32)에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하였는데, 경상도는 4부[대구·안동·진주·동래]로 분할되고, 각 부 아래의 군현은 모두 군으로 고쳐졌다. 이때 김산군, 지례현, 개령현은 모두 군이 되어 대구부에 소속되었다.
[교육 시설]
고려 말 이후 김천 지역의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조선조에 오면 김산현·지례현과 개령군은 수령이 파견되는 독립된 읍으로서의 위세를 가지게 되었다. 태종조 이후의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하에 향교의 건립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김산·개령·지례 등에서도 각기 조선 초부터 향교가 세워져 문풍이 일어나 사림파가 우거하기 시작하였다.
김천시 교동에 있는 김산향교는 1392년에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다가 1634년(인조 12)에 중건하고 1871년(고종 8)에 중수하였다. 1426년(세종 8)에 창건한 김천시 지례면 교촌리의 지례향교는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으나 1690년(숙종 16)에 중수하였다. 1473년(성종 4)에 창건한 개령향교는 1522년(중종 17)에 수축하고 1563년(명종 18)에 중수했으며, 1837년(헌종 3)에 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로 이건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김산향교에 폐합되었다가 1946년에 복원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학문 연구와 선현(先賢) 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 운영 기구로서 서원이 건립되자 김천의 재지 사족들도 서원 건립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648년(인조 26)에 설립한 김천시 성내동의 경렴서원(景濂書院)과 도동향사우, 1669년(현종 10)에 설립한 김천시 아포읍 대신리의 덕림서원(德林書院), 1756년(영조 32)에 설립한 춘천서원, 구성면 광명리의 경양서원, 1802년(순조 2)에 설립한 대덕면 조룡리의 섬계서원(剡溪書院)이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되었고, 섬계서원만 1961년에 복원되었다. 그리고 김천시 봉산면 예지리에는 봉암서당(鳳巖書堂)이 있다.
[재지 세력의 동향]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경우 각 군현에 ‘성씨(姓氏)’가 기록되어 있다. 각 군현에 실린 ‘토성’은 고려 시대 이래 그 읍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성씨 집단이다. 김산현의 경우 전(全)·김(金)·백(白)·이(李)이고, 어모현의 경우 박(朴)·정(鄭)·방(方)·오(吳)·전(田)·심(沈)이고, 지례현의 경우 박(朴)·전(錢)·장(張)·강(康), 개령현의 경우 홍(洪)·임(林)·문(文)·전(田)·심(尋) 등의 토성이 있었다.
개령 토성 가운데 홍씨·임씨 및 문씨가 사족으로 나타나며, 홍씨와 임씨는 이족으로서도 나타난다. 선조 때 문과 급제한 문승수(文承洙)와 문승사(文承泗) 형제는 개령 문씨로서 본관을 떠나 전라도 옥구에 거주하였다. 임건(林乾)과 박제광(朴霽光) 부자는 현리(縣吏)의 후예로 출사한 사림파였으며, 태종조 현리인 임비(林棐)는 효행으로 유명하였다. 홍균(洪鈞)·홍록주(洪祿遒) 부자는 고려 무신 집권기에 출사한 가문이고, 홍효조(洪孝祖)는 조선 시대의 개령현리였다.
김산현과 지례현 토성 가운데 사족은 장씨 뿐이고, 재지 토성의 성세는 미약하였다. 이족으로서는 백봉주(白鳳周)·박경의(朴慶儀)·박문성(朴文成) 등이 『연조귀감(椽曹龜鑑)』에 보인다. 백씨는 바로 김산현의 토성이며, 박씨는 김산군의 속현인 어모현의 토성이다. 이는 속현이 주읍에 폐합됨에 따라 그곳 토성도 흡수되어 주읍의 향역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장지도(張志道)는 조선 초에 등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나중에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지방 자제 교육에 몰두한 재지 사족이었다. 장지도의 세계(世系)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그의 문하에서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騭) 등이 나와 효제 등 유교의 실천 윤리를 시행하였다. 그들의 향촌 생활은 김종직(金宗直)의 경우와 닮은 데가 많았다.
개령·김산·지례 지방은 재지 토성의 성세가 미약하였지만 성주·선산·상주의 중간에 개재하여 영남 사림파에 속하는 인사가 들어와 사는 경우가 많았다. 정석견(鄭錫堅)·이세인(李世仁)이 개령에, 윤은보와 서즐이 지례에, 조위(曺偉)·이호성(李好誠)·금극화(琴克和)·이호인(李好仁)·최선문(崔善門)·이약동(李約東) 등이 김산에 각각 우거하였다. 이들 인사는 대개 영남 사림파와 관련을 맺거나 자신이 직접 사림파에 속하였다. 이들은 대개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 계층으로 성리학적 실천 윤리를 향촌 사회에서 몸소 실행하였고, 혹은 세조의 등극을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기도 하였다. 특히 김종직의 처향이 김산이라는 데서 이곳에는 재지 사족이 많았다.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구는 서울의 함락을 위해 교통로를 따라 빠르게 진격한 후 팔도를 분담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상도를 분담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5월 10일에 현풍을, 18일에 성주를 침입하였고, 6월 12일 개령으로 옮기고, 이곳에 왜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하여 주변을 공략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이로써 김천 지역은 왜군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개령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왜군과 의병 사이에 전개되었다. 구로다 나가사마[黑田長政]가 이끄는 우로의 왜군은 무계-성주-개령을 거쳐 4월 25일 교통의 요지인 김천역에 당도하였다. 김천역을 지키던 우방어사 조경(趙儆)과 조방장 양사준이 적을 맞아 싸웠으나 패배하여 조경은 상좌원[구성면]으로 피했다. 왜군은 김산에서 합류하여 금령평야에 진을 쳤다. 성주에 머물던 모리 데루모토 왜장이 6월 12일 개령으로 옮기고, 이곳에 왜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하여 주변을 공략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고령 출신의 김면(金沔) 등의 의병이 일어나 왜군을 공격하자 개령·김산 등지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왜적을 무찔렀다. 정경세(鄭經世)·권경호(權景虎) 등이 의병을 모집하자 개령·김산 등지의 사족(士族)들도 대거 호응해 왜적을 무찔렀다. 김천에서의 중요 전투로는 김천역 전투, 추풍령 전투, 우두령 전투, 지례 전투, 석현 전투, 공자동 전투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세도 정치가 전개되면서 봉건 체제의 모순이 노출되고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1862년(철종 13) 김규진(金奎鎭) 등의 주도하에 개령 민란이 일어나 민중의 반봉건 투쟁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김규진은 관기(官紀)의 문란으로 민폐가 심하다는 점을 지적한 격문을 돌리면서, 만일 백성 중 격문의 취지에 따라 봉기에 가담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가옥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개령현감 김후근(金厚根)이 김규진을 체포·구금하자 이 소식을 들은 백성 수천 명이 이천시장에 모여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개령 민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현감을 파면하고 향리를 처벌하는 한편, 주동자를 철저히 처벌함으로써 농민 항쟁을 수습했다. 개령 민란의 특징은 향반(鄕班)인 김규진이 주도했고, 이방도 농민 편에 가담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농민들의 실정이 그만큼 열악했고, 수령과 향리층의 수탈이 재지 사족이나 지주층에도 미쳤기 때문이었다. 개령 민란 이후에도 김천 지역의 농민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유리도산하여 화적 떼가 되기도 하였다.
『세장연록(世藏年錄)』에 의하면 1879년~1885년에 걸쳐 매년 몇 차례의 화적(火賊)이 김천에 출몰하였다. 농민들은 결국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다시 봉기에 나서게 되었다. 1894년 2월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이 동학 농민 항쟁으로 확대되자 이에 호응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특히 동학 농민 항쟁의 봉기 소식은 동학의 비밀 조직을 통하여 무주·영동을 거쳐 교통의 요충지였던 김천에 순식간에 알려졌다.
1894년 4월경에 김산·지례·거창에 농민 봉기의 조짐이 일자 20여 명의 동학 혐의자들이 체포되어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5월에 농민군이 전주를 장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창궐하기 시작하여 8월경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9월 말 동학 북접 교단이 무장 봉기를 결정하자 김산 농민군은 향내의 누적된 폐정 개혁의 활동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일본군과의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선산 관아와 해평의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 목표로 잡았지만 선산에서 해평으로 가기 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결국 경상감사 조병호가 이끄는 남영병이 개령을 거쳐 10월 5일 김산에 들어오면서 농민군들은 흩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