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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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寧郡 |
영어음역 | Gaeryeong-gun |
이칭/별칭 | 감주(甘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임삼조 |
폐지 | 14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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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 757년 |
관할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
[정의]
757년부터 1413년까지와 1895년부터 1914년까지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에 “18년에 국원(國原)[충주(忠州)]을 소경(小京)으로 삼고, 사벌주(沙伐州)[주치(州治)는 상주(尙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주치는 김천군(金泉郡) 개령(開寧)]를 두어 사찬 기종(起宗)으로 그곳의 군주(軍主)를 삼고, 신주(新州)[주치는 광주(廣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 제3 지리 1 신라에 “개령군(開寧郡)은 옛날 감문소국(甘文小國)인데 진흥왕 18년, 양(粱)[진(陳)의 오기(誤記)] 영정(永定) 원년에 군주를 두고, 청주(靑州)로 하였다가 진평왕 때에 주(州)를 폐하였다. 문무왕 원년에 감문군(甘文郡)을 설치하고, 경덕왕이 개령군으로 이름을 고쳐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 영현(領縣)이 넷이다.”라고 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 제57권 지(志) 제11 지리 2 상주목에 “개령군은 원래 감문소국으로서 신라가 탈취하였는바, 진흥왕 때는 군주를 두어 청주로 하였고 진평왕 때는 주를 폐지하였으며 문무왕 때는 감문군으로 하였고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본 목에 소속시켰으며 명종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개령현조에는 “본디 감문소국인데, 신라에서 취(取)하여 진흥왕이 청주를 설치하였고, [바로 진무제(陳武帝) 영정(永定) 원년 정축이다] 진평왕이 주를 폐하고, 문무왕이 감문군을 설치하였다가,[바로 당 고종(高宗) 용삭(龍朔) 원년 신유이다] 경덕왕이 개령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상주 임내(任內)에 붙였고, 명종 임진년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라고 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지례현조에 “본디 지품천현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개령군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경산부(京山府) 임내에 붙였으며, 공양왕 2년 경오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무주현(茂朱縣)에 “무풍현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이었다. 경덕왕이 무풍을 고쳐 개령군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는 진례현(進禮縣)에 예속시켰다가 명종 6년에 감무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제15권 여지고 3 군현 연혁 1 승국 이상 신라 상주에 “상주에 속현(屬縣)이 셋인데, 청효현(靑驍縣)·화창현(化昌縣)·다인현(多仁縣)이다. 관할하는 군(郡)이 10이다. …… 개령군은 속현이 4인데, 어모현·금산현·지례현·무풍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주(州)와 현(縣)에서는 “개령은 감문소국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청주를 설치하고 군주를 두었다가 감문군으로 고쳤고 개령으로 또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고쳤다. 감주(甘州)라고도 한다. 서울과의 거리는 558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개령군은 757년(경덕왕 16) 지방 행정 제도의 개편에 따라 감문군에서 개령군으로 바뀌었으며, 1413년(태종 13) 개령현이 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개령군 지역은 원래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이 있던 곳으로, 231년(조분왕 2) 이찬(伊飡) 석우로[내해이사금의 아들]에 의해 신라에 병합되면서 감문군이 설치되었다. 557년(진흥왕 18) 이곳에 청주를 설치하고 군주를 두었다가, 진평왕 때 주가 폐지되었다.
661년(문무왕 즉위년) 다시 감문군으로 환원되었다가, 757년에 개령군으로 바뀌었다. 당시 개령군에는 어모현, 김산현, 지례현, 무풍현 4개의 속현이 있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상주의 관할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이곳에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개령현이 되면서 현감을 두었다. 1601년(선조 34) 길운절(吉雲節)의 반란으로 김산군(金山郡)에 합병되었으며, 1606년(선조 39) 다시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로 이속되었다.
1609년(광해군 1) 다시 개령현으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가 시행되면서 개령군으로 승격하였고, 대구부(大邱府)의 관할이 되었다. 1896년 13도제가 시행될 때 경상북도의 4등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김산군·지례군(知禮郡)과 함께 김천군으로 편제되어 개령면이 되었다. 1949년 금릉군이 설치됨에 따라 개령면은 금릉군에 속하였고, 1995년 금릉군과 김천시가 통합되어 김천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