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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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知禮巨勿里義兵抗戰 |
영어음역 | Jirye Geomul-ri Uibyeonghangjeon |
영어의미역 | Resistance Militia of Geomul-ri, Jiry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거물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호동 |
발생|시작 | 1908년 3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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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1908년 8월 19일 |
발생|시작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거물리 |
종결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거물리 |
성격 | 의병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최경연|김술이|오경명 |
[정의]
1908년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거물리에서 일어난 의병 항전.
[개설]
지례 거물리 의병 항전에 대한 의병군 측 기록은 없고 다만 일본군 사령부의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나 경찰 계통의 『경북고등경찰요사』에 폭도 토벌과 재판 기록으로 전한다. 『조선폭도토벌지』에 의하면 1908년 3월 3일 지례군 거물리[현 지례면 거물리]에서 폭도[의병]와 교전 끝에 괴수 등 4명을 사살하였다고 전한다.
[역사적 배경]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 1907년 한국 군대의 해산으로 인해 의병 항전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김천과 지례에도 각각 헌병대와 수비대가 있었다. 김천에서 일어난 김산장의군(金山杖義軍)이 관군에 흩어지고 호서 지방의 의병 군진으로 합류되거나 이곳저곳에 수십 명씩 모여 일본 헌병대 또는 수비대와 때때로 교전하는 등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한국 군대의 해산에 따라 의병 활동이 활발해지자 지례 거물리 의병 항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1908년 8월 19일 대구지방재판소 판결문에 의하면, 최경연(崔敬淵)[지례군 증산면 유성리, 50세]은 1908년 음력 2월 그믐 수괴 박계장(朴啓長)의 당에 가담하여 총을 휴대하고 지례군 거물리에 가서 유숙하고 있던 중 일본 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산중으로 은피하였다가 2일 뒤에 총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고, 김술이(金述伊)[지례군 동면 청천동, 35세]는 3월 1일 수괴 박계장 당에 입참하고 3월 3일 거물리에서 일본 수비대와 접전하여 대장 포군 4명이 전사하므로 패전하고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결과]
재판 결과 최종적으로 “최경연·김술이·오경명(吳敬明)은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난을 일으킨 자들로 지휘를 받아 하수한 자”라는 판결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