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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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 |
영어음역 | Geundae |
영어의미역 | Modern Ag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개항기에서부터 광복 이전까지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역사.
[개설]
김천은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 개혁에서 김산군·개령현·지례현은 모두 군으로 되었고, 1905년 증산면이 성주군에서 지례군으로, 다음 해에 성주군 신곡면(薪谷面)과 황간군(黃澗郡) 남면이 김산군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개령군·김산군·지례군이 김천군으로 통폐합되었다. 1917년 10월 1일부터 김천은 조선 총독부에 의해 특별면으로 지정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인 면장 대신에 일본인 면장을 두게 되었다. 김천의 일본인 사회는 지방 출신 인물이 면장이 되길 바랐으나 기대와는 달리 지방과는 관련이 없는 스즈오카 세이이치[鈴岡正一]이 취임하였다. 면장의 상담역으로는 모리모토 오토지로[森本音次郞], 기이 고레타카[城井惟隆], 황필주(黃苾周), 추응천(秋應天) 등이 임명되었다. 신임 면장은 취임 직후 한국인 5명, 일본인 10명으로 하여금 사업 조사 위원회를 구성케 하여 면장의 자문에 응하도록 하였다.
1918년 12월 야마가미 산라쿠[山上三樂]이 새로운 면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이내 사임하고 1919년 11월에 무라사키 사다노스케[紫崎定介]가 새로이 면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지지부진하던 감천 호안 공사를 3만원의 경비로 4개년 계획으로 1919년에 착수하였다.
1920년 면제 개정으로 면 상담역 제도는 없어지고 18명으로 구성되는 면협의회를 설치하였다. 제1회 김천면협의원의 선거는 1920년 11월 20일에 실시되어 한국인 5명, 일본인 5명이 당선되었다. 특별면의 요건으로는 상공업자 5백호 이상 거주하고, 호당 평균 면 경비 7원 이상을 부담해야 했다. 이때 경상북도 내에 특별면은 김천을 비롯하여 영일군 포항이 있었다.
김천 특별면은 1928년 감천면 지좌동 전역을 편입해 면세를 확장하였다. 1930년 12월 지방 제도 개정령이 공포됨에 따라 1931년 4월 1일자로 김천 특별면이 김천읍으로 승격되었다. 경상북도 내에는 김천을 비롯하여 포항·경주·안동·상주 등이 함께 읍이 되었다.
[김천의 근대사]
1. 개설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김천군에서는 일제의 침탈에 맞서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항 이후 한일 병합 조약의 체결 이전 시기에 국권 수호와 회복을 위한 운동으로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고, 그리고 국권 회복 운동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 독립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리하여 민족 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과 1920년대 국내외의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여 근대적인 국민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 운동으로 승화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정책을 반대하고 조국 광복과 자주적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2. 동학 농민 운동
김천에서 농민군이 조직된 시기는 대체로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장악한 이후일 것으로 보이며, 1894년 8월 무렵 김천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김천의 동학 조직은 김천장터를 비롯하여 대항면, 조마면, 구성면, 봉산면 등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김천군 동학의 주요 인물 가운데 양반 출신이 포함되어 있는 특징을 보였다.
김천군의 동학 농민군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승지였던 봉계의 조시영, 구성면 광명리 기동의 여영필, 여위룡, 배헌 등이 그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여위룡과 그의 아들 여영조(呂永祚)가 가장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들 여씨 집안의 토지는 기동과 그 주변에 많이 분포해 있었는데, 이들은 소작 농민에 대한 탐학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소작인을 무시하는 태도 또한 심했기에 소작인에게 인심을 많이 잃었다. 1894년 9월에는 김산과 지례에서도 동학 농민군의 일부 지주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다. 김산은 여영조에 대한 공격이 벌어졌던 것이다.
1894년 9월 교주 최시형이 김산의 도집강 편보언(片甫彦)에게 기군령을 내리자, 이에 편보언은 농민군을 이끌고 상주와 선산을 공략하였고, 선산 해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하기도 했다. 또 편보언은 각처 접주들에게 기군령을 전달하였다. 이에 강주연은 죽정에서, 배재연은 신하에서, 김정문은 기동에서 강기선은 하기동에서, 권봉제는 장암에서, 조순재는 봉계에서, 장기원은 공자동에서 농민군을 무장시키고 대기하였다.
김천 지방의 동학 농민군은 경상감사 조병호가 보낸 남영병에 의해 조직력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남영병은 9월 26일 선산에서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10월 5일 개령을 거쳐 김산에 들어왔다. 10월 6일 농민군 강기선은 남영병에 붙잡혀 곤장을 맞은 뒤 총살당하였다 10월 7일에는 공자동에 있던 농민군의 근거지가 초토화되었으며, 10월 8일에는 지례에서 농민군 4명이 처형당하였다. 이로 인해 김천 일대의 동학 농민군은 패퇴하였고, 기존의 질서가 복구되었다.
3. 한말 국권 회복 운동
‘국권 회복 운동’은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 그리고 구국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김천 지역의 경우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의병 전쟁에서는 1816년 김산장의군(金山杖義軍)에 지역의 유림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이에 지역 출신으로 김산장의군에 참여한 여중룡(呂中龍)은 『남은유고(南隱遺稿)』에서 관련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 1908년 지례군 거물리에서 의병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또한 일제 관헌 기록에 따르면 김천 지역에서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지속적으로 일제의 침탈에 맞선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김천의 계몽 운동은 비밀 결사 신민회에 김태연과 편강렬(片康烈)이 참여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되자 이에 적극 동조한 을사오적에 대해 오적 제거 계획(五賊除去計劃)이 추진되었는데, 여기에 지역의 여영조·나인영·이기찬·오기호·윤주찬·김민석·민형석·최동석 등이 참여하였다. 1907년 경제적 계몽 운동의 차원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김천에서도 ‘금천군금주단연회’가 조직되어 국채 보상 운동에 동참하였다. 또 계몽 운동의 주요 방향이었던 학교 설립 운동이 김천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4. 1910년대 독립운동과 3·1운동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 폭압 정치 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은 대한독립 의군부, 조선 국권 회복단, 대한 광복회 등 비밀 결사에 의해 전개되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외 정세 변화를 계기로 민족 독립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3·1운동으로 나타났다.
이에 김천 지역에서도 서울과 대구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김천 시내를 비롯한 관내 주요 면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먼저 서울과 대구의 만세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아 3월 11일 김수길(金壽吉)과 김충한(金忠漢)을 중심으로 용두동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후 3월 20일 기독교와 천주교 신자들의 연합인 교회 연합 시회, 3월 24일 용두동 시위, 4월 1일 만천봉 만세 시위 등이 발생하였다.
또 개령에서는 3월 24일부터 4월 6일까지 4차례에 걸쳐 만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외에 양천동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일본 헌병대 구내에 들어가 만세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편지로써 일제의 한국 지배의 부당성과 독립 의지를 표현한 투서 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직후 김천 지역의 유림은 지역의 유림 세력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독립 청원 운동으로 일어나 ‘파리 장서 사건’에 참여하였다.
5. 1920년대 독립운동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국내외의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여 근대적인 국민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 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된 대한 독립 후원 의용단, 군정서의 의용병·자금 모집 등 비밀 결사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주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모집 등의 활동이 펼쳐졌다. 또 무장 투쟁과 폭탄 테러 등의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자고 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임정 군자금 모집 및 군정서 모병 운동, 대한 독립 후원 의용단 등이 일어났다.
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이념적으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진행되었다. 1920년대 접어들어 지역에서는 대중 단체 결성과 활동을 통한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경상북도에서도 독립운동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1920년 금릉 청년회의 결성으로 시작된 청년 운동은 ‘김천청년연맹’, ‘김천청년동맹’으로 확대 발전되어 지역의 대중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1922년에 결성된 김천 형평지사는 조선조 백정의 신분 차별에 맞서 신분 해방을 지향한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여성 운동·노동 운동·소년 운동 등 대중 운동 단체가 속속 결성되어 일제의 침탈로 인한 대중들의 사회 경제적 위기를 원호하고, 대중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며, 식민지 현실을 자각케 하여 민족 독립의 의지를 북돋웠다. 1927년 국내외에서 민족주의 계와 사회주의 계가 협동 전선을 구축하여 민족 운동의 지도 기관을 설립하자는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이 일어나 신간회가 창립되자 김천 지역에서도 그 흐름에 따라 신간회 김천지회와 근우회 김천지회가 설립되어 지역의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6. 1930년대 독립운동
1930년대 이후 항일 독립운동은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수행을 반대하고 나아가 조국 광복을 목표로 국내외에서 전개되었다. 이 시기 김천의 대표적인 운동은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김천그룹 재건협의회 활동이었다. 이 운동은 1920년대 지역 사회 민족 운동의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전쟁 정책에 반대하면서 민족 독립을 위한 것이었다.
7. 특징
김천 지역의 독립운동은 유교적 전통이 기반이 되고 있었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유교적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위정척사 운동이 나타났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유교적 전통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비밀 결사 운동이 펼쳐졌고, 파리 장서 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또 일제 강점기 대표적 독립운동인 3·1만세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고, 대중 운동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김천 지역의 민족 운동은 전국적인 흐름에 동참하면서, 지역의 사회 문제를 민족 문제와 연관시키며 독립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1930년대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지역에서는 조선공산당 김천그룹 재건협의회가 결성되어 1920년대 지역 사회의 사회 운동을 확대시키면서 전국적 차원의 운동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김천 지역의 독립운동은 식민지 민족 운동이 전국적으로 승화되고, 국내외에서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1907년 이후 허위(許蔿)의 의병 부대는 김천·지례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김천면에서는 3월 24일과 4월 5일에, 개령면에서는 3월 24일부터 4월 6일까지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유림들의 파리장서사건에는 김천 출신 이석균(李碩均)··이명균(李明均)·송준필(宋浚弼) 등이 가담하였다. 그리고 1929년 김천 소년회·청년회는 만주 동포에 대한 탄압 문제를 거론하면서 배일운동(排日運動)·배중국운동(排中國運動) 등을 추진하였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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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0 |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 면장의 상담역으로는 삼본음차랑 성비유융(森本音次郞 城非惟隆), 황필주(黃苾周), 추응천(秋應天) 등이 임명되었다 ->면장의 상담역으로는 삼본음차랑(森本音次郞), 성비유륭(城非惟隆), 황필주(黃苾周), 추응천(秋應天) 등이 임명되었다 |
2011.07.20 |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 면장의 상담역으로는 삼본음차랑 성비유융(森本音次郞 城非惟隆), 황필주(黃苾周), 추응천(秋應天) 등이 임명되었다 ->면장의 상담역으로는 삼본음차랑(森本音次郞), 성정유륭(城井惟隆), 황필주(黃苾周), 추응천(秋應天) 등이 임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