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4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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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秋風嶺戰鬪 |
영어음역 | Chupungnyeong Jeontu |
영어의미역 | Chupungnyeong Batt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호동 |
발생|시작 | 1592년 4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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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1592년 4월 27일 |
발생|시작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
종결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이수광|양사준|정기룡|김수|장지현|장효현 |
[정의]
임진왜란 당시 추풍령에서 일어난 김천의 대표적 전투.
[역사적 배경]
1592년 3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각 읍을 함락하고 북진하자 조정에서는 17일 강계부사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임명하여 즉시 추풍령으로 떠나게 하였다. 조경은 이수광(李睟光)을 종사관으로, 양사준을 조방장으로 삼아 100여 명의 관군을 이끌고 김산 김천역에 당도하였다.
때마침 진주성 훈령봉사인 30세 청년무사 정기룡(鄭起龍)이 고향인 상주에서 변보를 듣고 진주 임지로 가다가 조경 군진으로 찾아와 종군을 자청하였다. 4월 23일 돌격장에 임명된 정기룡이 기병 10명을 이끌고 거창 못 미쳐 신창에서 적의 선봉 500여 명과 조우하여 싸우다가 김산으로 후퇴하였다.
이 무렵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가 지례로 피신하면서 모병한 군사를 김산에 보내었고, 황간에서 창의한 장지현(張智賢)·장효현이 합류하여 5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4월 25일 무계~성주~개령을 거쳐 김산에 들어오는 왜군을 김천역[지금의 김천시 남산동]에서 기다려 싸웠으나 패배하고, 상좌원[구성면]으로 피신하여 다시 군대를 모아 4월 27일 1만여 명의 왜군과 추풍령 전투를 벌였다.
[경과]
4월 26일 해질 무렵, 조경과 돌격장 정기룡이 500여 군졸을 이끌고 금산[지금의 추풍령휴게소 동쪽]에 올라 군사를 분산시키고 한꺼번에 청솔가지로 연기를 피워 저녁밥을 짓게 하고, 밤에는 한 사람이 네댓 개의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다니게 하여 군사가 많음을 위장하였다. 또 기습을 예측하여 황소 10마리에 호랑이 가죽을 씌우고 꼬리에 홰를 달아 놓았다.
[결과]
밤에 왜적이 기습하자 산 위에서 황소 꼬리의 횃불에 불을 붙여 산 아래로 몰아 쫒으니 혼비백산한 왜적 수백 명을 4월 27일 새벽에 몰살하였다. 날이 밝자 왜군이 우리 군사가 적음을 알고 1만 병력을 투입하여 백병전이 벌어졌다. 그때 정기룡이 일당백기로 분전하면서 적병에 잡힌 조경을 구출하는 등 활약하였지만 결국 적에게 길을 내어주고 성계산[지금의 추풍령휴게소 서쪽]으로 피하였는데, 그 군사가 반으로 줄었다.
[의의와 평가]
정기룡이 이끄는 500여 군사가 김천으로 들어오는 왜군을 맞아 김천역 전투에 이어 추풍령 전투에서 적에게 타격을 가하여 왜군의 북진을 지연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추풍령 전투에서 정기룡이 적진에서 주장인 조경을 구출한 것을 비롯해 크고 작은 60여 전투에서 왜적을 무찌르는 무훈을 드높였다. 한편 황간에서 창의한 장지현·장효현이 추풍령 전투에서 흉탄에 맞아 순사하였다. 그들을 기리는 순국비가 황간역에 세워진 것은 추풍령 전투에서 의병의 활약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