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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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韓獨立後援義勇團 |
영어음역 | Daehan Dongnip Huwon Uiyongdan |
영어의미역 | Korean Independence Volunteer Support Group |
이칭/별칭 | 조선독립후원의용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설립 목적]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은 3·1운동 이후인 1920년 9월 경상북도 김천에서 비밀리에 조직되어 1922년 일제 관헌 당국에 탄압을 받을 때 까지 활동한 독립 운동 단체이다. 주요 활동은 독립 운동 자금과 독립 운동 활동가를 모집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주요 인물은 김찬규(金燦奎)·신태식(申泰植)·이응수(李應洙)·장세명(張世明) 등 대부분 김천을 비롯한 경상도 출신이었다.
[변천]
김찬규는 조선민족대동단의 단원으로 활동한 인물이었으며 1920년 음력 4월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김응섭(金應燮)을 만나 독립 운동을 계속하기로 하고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경상북도 김천에서 신태식·이응수 등과 만나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을 결성하였다.
1922년 6월 문경군 불암역 주변 여관에서 일제 경찰에 검문을 받던 김찬규의 가방에서 권총 한 자루와 실탄 16발, 폭탄용 뇌관이 달린 도화선, 군자금 모집 위임장 두 장, 암호표, 군정서부총재 김응섭이 그의 아우 김동진에게 보내는 서한 등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김찬규는 대한독립후원의용단에 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 후 11월 28일 대구의 계림여관에서 이태기 등 4명이 대구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비로소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의 조직이 드러났다. 사건 관련자들은 1922년 12월 18일과 22일에 검찰에 송치되었다. 이 중 김천 출신 군량총장 이명균은 1923년 3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집에서 요양하다 사망하기도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0년 12월 무렵 김찬규는 김천에서 이응수에게 김동진(金東鎭)으로부터 전달받은 서로군정서 발행의 군자금 모집 임명장, 서로군정서 군무총장 노백린 발행의 사형선고서, 상해 임시정부 명의의 독립 선언에 관한 경고문 등을 넘겨주었다. 이들은 대구에서 이대기와 양한위, 예천에서 김병동, 경상남도 창녕에서 김돈희, 거창에서 정내우 등을 설득하여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리고 경상북도 단장 신태식, 총무국장 이응수, 군무총장 장세명, 군량총장 이명균, 재무총장 김병동, 군무국장 김병포, 재무국장 서상업·손성운, 경주지국장 허달, 경남 단장 김찬규, 총무국장 김홍기, 재무국장 김돈희 등으로 조직을 구성하여 경북 각 지역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1922년 1월부터 11월 사이에 경상북도 경산의 안병길(安炳吉), 청송의 조규한(趙奎漢)·황보훈(黃普薰)·조병식(趙炳植), 안동의 이중황(李中晃)·최명길(崔命吉)·권병규(權炳奎), 영일의 이경연(李慶淵)·이원기(李源璣), 영천의 권중황(權重晃), 군위의 홍해근(洪海根)·홍정수(洪貞修), 영덕의 권모 외 1명, 경상남도 창녕의 신연식(辛延植) 등에게 자금 지원을 촉구하는 서신과 불응할 때는 처단한다는 사형선언서를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의의와 평가]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은 3·1운동 이후 독립 운동이 국외와 연계되면서 무장 독립 투쟁과 독립 운동 자금 확보 운동을 전개한 비밀 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