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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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帽岩洞住居地遺蹟 |
영어음역 | Moam-dong Jugeoji Yujeok |
영어의미역 | Dwelling Remains in Moam-dong |
이칭/별칭 | 김천 모암동 유적,모암동 마을 유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모암동 94-18번지 외 18필지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이주림 |
발굴 조사 | 19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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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 1997년 12월 |
발굴 조사 | 1999년 5월 10일 |
발굴 조사 | 1999년 6월 28일 |
발굴 조사 | 1999년 9월 13일 |
발굴 조사 | 2000년 6월 20일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모암동 94-18번지 외 18필지 |
성격 | 집터 |
면적 | 15,537.26㎡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모암동에 있는 삼한 시대에서 삼국 시대의 주거지 유적.
[개설]
모암동 주거지 유적은 1996년부터 2010년에 걸쳐 시굴 및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1996년에는 김천시 문화유적 지표 조사가 김천시 전역에서 이루어지면서 모암동 주거지 유적도 조사되었다. 1997년 12월에는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경부고속철도 대구·경북권 발굴 예비 조사의 일환으로 모암동 주거지 유적을 조사하였다.
본격적인 발굴은 1999년부터 2000년에 걸쳐 영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경상북도 김천시 모암동 94-18번지 외 18필지 약 1만 5537.26㎡[4,700평, 1차 200평, 2차 4,500평]에 대해 1차 1999년 5월 10일~1999년 6월 28일, 2차 1999년 9월 13일~2000년 6월 20일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1차 발굴 조사는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봉토분 3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2차 발굴 조사는 1999년 9월 13일부터 시작하여, 동계 기간인 1999년 12월 31일부터 2000년 2월 20일까지 작업을 일시 중지하였다가, 조사를 재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치]
경상북도 김천시 모암동 94-18번지 외 18필지이다. 모암동 주거지 유적은 김천시 모암동에 있는 해발 약 106.2m의 나지막한 구릉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북쪽으로는 경부고속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지형적으로 직지천(直指川)이 서에서 동으로 굽어들면서 감천(甘川)과 합류하는 지점이기도하다. 유적이 입지한 곳은 공교롭게도 직지천과 접하는 사면이 아니라 반대편 사면이다. 이는 아마도 강변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을 피할 수 있고, 특히 겨울에 햇살을 하루 종일 받을 수 있는 이점을 선택한 결과가 아닐까 여겨진다. 더불어 나지막한 구릉에서 경관을 조망하면, 모암동 주거지 유적 주변에 강과 충적 대지가 펼쳐져 있고 배후에는 고성산(高城山)이 자리 잡고 있어 생업에 좋은 환경임을 짐작할 수 있다.
모암동 주거지 유적 주변에는 부곡동 고분군(富谷洞古墳群), 평화동 고분군(平和洞古墳群), 성내동 고분군(城內洞古墳群), 신음동 고분군(新音洞古墳群), 교동 고분군(校洞古墳群), 덕곡동 고분군(德谷洞古墳群) 등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형태]
주거지는 대부분 능선의 사면에 입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석실분은 능선의 정상부와 사면을 따라 입지하고 있다. 삼국 시대 석곽묘는 주축 방향이 등고선과 평행하게 조성된 반면, 고려 시대 석곽묘는 등고선과 직교되게 조성된 점이 특징이다. 고려 시대~조선 시대 분묘는 유적 전범위에서 골고루 확인되었다. 주거지 주변에는 생활 유구로 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수혈이 확인되고 있다.
주거지는 기원후 3~4세기 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유적 내에서 주거군의 밀집도가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복 양상을 다수 보이고 있는데, 이는 주거지의 개축과 관련되는 현상으로 판단된다. 주거지의 전반적인 양상으로는 우선, 평면 형태가 대체로 장방형과 반월형으로 보이고, 벽체의 축조는 벽구를 이용하여 목주를 세우고 점토를 발랐던 것으로 관찰되는데, 일부 주거지에서 소토화(燒土化)된 벽체가 확인되기도 한다. 주거지 내의 시설로서, 바닥은 대부분 암반면이나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나, 일부 주거지에서는 점토를 바르고 불다짐한 바닥면이 확인된다. 노지 시설은 일부에서만 확인된다.
주거지는 입지에 따라 두 가지 양상을 보인다. 즉, 급경사면에 입지한 것은 등고선과 평행한 방향으로 평면 형태가 반월형 또는 장방형을 보인다. 현재의 지형을 살펴보면 구(舊) 지형도 현재와 유사했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원형·말각방형(抹角方形)·장방형 주거지들이 삭평 혹은 유실되어 반월형이나 장방형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런 형태의 주거지들은 유적 내 서쪽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이 지점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다른 양상의 주거지는 경사도가 약하거나 거의 평탄면에 가까운 곳에 입지하며, 평면 형태가 말각방형과 장방형으로 유적 중앙과 동쪽 사면에 분포한다. 이곳에 입지한 주거지들은 유적 서사면에 입지한 주거지들보다는 규모가 크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주혈(柱穴)이 있는 것[6호와 7호 주거지 외]은 물론이지만, 주혈이 없는 것[11호 주거지]도 벽체를 조성했음을 확인하였다. 2010년 현재, 유적의 동쪽 완경사면의 주거지는 모두 조사 중이며 향후 조사 진척에 따라 주거지의 다양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1. 2호 주거지
모암동 주거지 유적 서쪽 남서사면에 있고, 북서쪽 50㎝에 1호 주거지가 있다. 황갈색 암반층에서 노출된 유구는 평면 형태가 말각방형으로 추정되며 남쪽이 유실되었다. 유구의 규모는 428×[340]㎝, 깊이 53㎝이고, 내부에는 대체로 점성이 많고 매우 단단한 황갈색 사질점토 등이 퇴적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북변 양단에 치우쳐 직경 40㎝, 깊이 50㎝가량의 주혈이 2개 확인되는데, 특히 단면 관찰로 보아 동쪽의 기둥은 주거지 중앙부 쪽으로 기울게 설치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바닥면은 암반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되며 남서쪽에 치우쳐 장경 60㎝ 정도의 붉게 소토화된 부분이 관찰되는데 노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외의 시설로는 북동쪽의 주혈 주변에 암갈색 사질점토가 채워진 소혈(小穴)이 1개 확인된다. 유물은 내부토 제거 중에 토기편 몇 점만 수습되었다.
2. 7호 주거지
모암동 주거지 유적 서쪽 서사면에 조성되어 있고, 7호 수혈과 연접해 있다. 남서쪽에는 6호 주거지, 남동쪽에는 8호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다. 황갈색 암반층에서 노출된 유구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고, 북서부가 근대 분묘에 중복되었고, 서장부가 유실되었다. 유구의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평행하고 잔존 규모는 장축 645㎝, 단축 238㎝, 깊이 75㎝이다.
7호 주거지는 상부 구조가 화재로 탄화되어 잔존하며, 경사면에 등고선을 따라서 형성된 ‘길’ 유구와 연결되어 나타났다. 조사 결과, 유구의 축조는 ‘길’이 먼저 만들어진 후 주거지를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상면(床面)의 확보를 위해 주거지 안쪽에 포함되는 ‘길’ 부분을 메워서 정지(整地)하였다. 건물의 축조는 먼저 동장벽 쪽 양단에 주주(主柱) 2매(枚)를 세우고, 그 사이에 폭 40~50㎝, 높이 10㎝가량의 둑을 쌓고, 그 위에 18매의 벽주(壁柱)를 세우고 둑과 벽주 외면(外面)에 황갈색 점토를 발라 벽체를 형성시켰다.
두 개의 주요 기둥의 간격은 450㎝이고, 북쪽 주주는 단면 관찰로 보아, 주거지 중앙부로 경사지게 설치되었다. 벽주는 직경 10~15㎝, 깊이 5㎝ 내외이고, 각기 간격은 5㎝ 정도이다. 노출 상태로 보아 벽주는 폭 16~18㎝이고, 길이는 최대 92㎝이다. 이 벽주 위로는 주거지의 장축 방향으로 진행하는 폭 3㎝ 내외의 목재가 확인되는데 벽주를 가로로 가로지르게 설치되었던 가구재(架構材)로 판단된다. 벽주 밑으로는 폭 20㎝의 목재 2매가 확인되며 측정 가능한 최대 길이는 133㎝이다.
상면(床面)은 암반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상면(床面) 중앙부에는 폭 25㎝, 깊이 2~5㎝의 얕은 구(構)를 만들었다. ‘길’과의 연결 부분에는 벽주가 확인되지는 않았고, 관찰 결과 주거지 안쪽으로 무너진 벽주 밑에 소토 덩어리와 황갈색 점토가 노출되었으며, 그 밑에 두께 2~4㎝의 탄화된 잔가지들이 노출되었다. 즉, 소토 및 점토는 출입구와 관련 있던 지상의 시설이 건물의 화재와 더불어 무너지면서 벽주 밑에 깔리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화재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3. 11호 주거지
유적 서쪽 남서사면에 있고, 남단부가 21호 주거지에 중복되었고, 22호 주거지 및 23호 주거지를 중복하였다. 황갈색 암반층에서 노출된 유구는 평면 형태가 반월형을 띠며 잔존 규모가 장축 610㎝, 단축 260㎝, 깊이 56㎝이고, 장축 방향이 등고선과 평행하다. 유구는 건물의 상부 구조가 화재로 탄화되어 잔존하며, 중앙부에 장축 315㎝, 깊이 20㎝ 정도의 평면 반월형(半月形)의 수혈이 있다.
11호 주거지 내에서 주혈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확인되지 않았는데 상부 구조의 노출 상태를 관찰해 보면, 상부 구조는 벽면과 벽 가장자리를 따라 폭 5㎝ 내외의 목재들이 촘촘히 주거지의 단축 방향으로 노출되며, 그 위에 장축 방향의 목재들이 노출되었다. 특히 가장 밑에서 노출된 단축 방향의 목재들은 부분적으로 황갈색 점토와 뒤섞여 노출된 양상이었는데, 이로 보아 5㎝ 내외의 목재를 이어 세우고 황갈색 점토를 발라 벽체를 형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11호 주거지의 중앙부에는 단축 방향의 목재들이 유물을 덮고 있었다. 유물은 내부 퇴적토 중에 다량의 토기편이 수습되었으며, 중앙부 수혈 내에서 단경호(短頸壺) 1점과 두귀항아리[兩耳附壺] 1점이 노출되었다.
4. 25호 주거지
모암동 주거지 유적의 동쪽 사면 해발 약 85m 지점에 위치하며 주축 방향은 동-서향이다. 주거지의 동쪽 부분은 도로 공사로 인해 잘려 나가 단애면으로 형성되어 있어 주거지의 동쪽 일부가 파괴되었다. 또 표토 바로 아래층에서 주거지가 확인되기 때문에 주거지의 상면은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따라서 주거지 내부는 바닥면과 주혈들만 확인되고 벽체나 굴광 등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주거지 내부에는 여러 개의 교란 구덩이들이 주거지를 파괴하였다.
자연 유실과 교란 등으로 인하여 주거지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주거지의 형태와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주혈들이다. 주거지의 주혈은 크게 내주혈과 외주혈 그리고 기타 주혈들로 구성되어 있다. 외주혈은 주거지의 벽체 바깥을 따라 촘촘히 돌아가며 내주혈은 벽체 안쪽을 따라 확인된다. 내주혈은 주거지의 서쪽 부분에 있어 두 겹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기타 주혈은 내주혈의 내부와 외주혈의 바깥 등지에서 확인되는 주혈이다.
내주혈과 외주혈은 폭 15㎝ 내외의 구(溝) 내부에 형성되어 있으며, 거리는 약 110㎝ 정도이다. 일부 남아 있는 벽체흔[황색 점토와 황갈색 사질점토]을 통해 볼 때 벽체 시설은 내주혈과 외주혈 사이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주혈·외주혈에 있어 주혈 간의 간격은 5~20㎝ 정도이고 깊이는 10㎝ 내외 정도이다. 내주혈·외주혈 모두 경사면 아래쪽, 즉 주거지의 남쪽 장벽 부분은 확인되지 않았다. 기타 주혈들은 다수가 확인되고 있으며 일부는 외주혈의 바깥을 따라 비교적 정형성을 띠는 것으로 생각된다.
외주혈을 기준으로 볼 때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가 약 11m 정도로 추정된다. 주거지 내에 벽체나 기타 시설을 통해 공간이 분할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고, 다만 주거지의 중앙부에 남북으로 이어지는 폭 10㎝ 정도의 구(溝)가 배수구 역할과 공간 분할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주거지의 바닥은 대부분이 파괴되고 잘 남아 있지는 않지만 불다짐이 일부 확인된다. 바닥이 유실된 부분의 생토는 붉게 소토화되어 있다. 유물은 주거지의 내부에서 정치(定置)되어 출토된 것은 없으며 모두 내부토와 함께 편으로 출토되었다.
[현황]
영남문화재연구원이 1999년부터 2010년 현재까지 발굴 조사한 결과, 모암동 주거지 유적에서는 삼한~삼국 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 44기, 수혈 8기, 기유구 2기, 주혈군 2기, 삼국 시대 석실 3기, 석곽 12기, 통일 신라 골호(骨壺) 1기, 고려 시대 석곽묘 6기, 시대 불명 석실 1기, 석곽 1기, 고려~조선 시대 목관[토광묘] 64기 등 모두 146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1,130여 점이 출토되었다. 모암동 주거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삼한 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의 각 시기별 유물이 확인된다. 삼한 시대 유물로 주거지 내에서 확인된 유물은 적갈색 연질(軟質) 옹류과 와질(瓦質)의 단경호류가 있고, 6호 주거지 내에서 갈판이 1점 확인되었다. 주거지 주변에서는 다량의 토기편이 수습되는데, 주로 적갈색 연질, 와질의 단경호류와 시루 등이 있고, 도질 토기류로는 대호 등의 대형 토기류가 다수 관찰된다.
삼국 시대 유물로는 굽다리접시[有蓋高杯], 뚜껑달린단지[有蓋短頸壺], 부가구연대부장경호(附加口緣臺附長頸壺), 병, 유개발 등의 토기류와 철재 고리, 장식용 철제품, 철부(鐵斧), 도자 등의 철기류가 있고, 3-1호 석실에서 시대석(屍臺石)으로 사용된 두침석(頭枕石)과 족좌석(足座石)이 확인되었다. 고려~조선 시대 유물로는 백자, 청자, 도질병, 도질옹 등의 토기류와 청동합, 청동수저, 청동집게, 반지 등의 청동기류, 가위, 관정 등의 철기류, 기타 옥류 등이 확인되었다.
[의의와 평가]
첫째, 김천 지역에서 처음으로 삼한~삼국 초기[3~4세기대]에 해당하는 주거지가 다수 조사되어, 고대 주거 건축 기법의 양상과 주거 유적의 입지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영남 지역의 이 시기 생활 유적으로는 대구 서변동 유적, 경산 임당동 유적, 경주 황성동 유적 등 극히 일부만 조사되어, 이번 조사를 통해 당시 생활 유적의 다양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 모암동 주거지 유적에서는 삼한 시대로부터 삼국 시대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 특히, 석실분 출토 토기류 일부에서 강한 지역색을 보이고 있고, 다른 지역에서 온 반입품도 일부 출토되는 점으로 볼 때, 다른 지역과의 교류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삼국 시대[6세기 중반~후반] 석실분이 다양한 형태로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 석실의 구조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낙동강 중류역의 약목 고분과 성주 성산동, 대구 비산동 등지에서만 확인된 판석조 석실분과 동일한 구조의 석실분[1호]이 조사되어 이들 지역과의 비교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고, 시상대의 구조가 상주·함창 지역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들 지역과의 연관성이 상정된다. 또한, 신라 수도 경주에서만 출토되는 정형화된 두침석과 족좌석이 3호 방형 석실분에서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3호 석실분을 비롯한 나머지 석실분의 피장자는 고대 김천 지역의 수장급으로 추정되며 묘제와 유물의 비교 검토를 통해 경주 지역과의 상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1호 판석조 석실분과 4호 횡구식 석실분에서는 묘제와 유물에서 재지적 성격이 잔존하고 있으나, 이보다 늦게 조성된 3호와 21호 방형 석실분에서는 전형적인 경주적 묘제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 지역의 수장층의 묘제와 유물상이 6세기 중엽경까지 재지적 성격이 강하게 존속하다가 중엽을 기점으로 전형적인 경주형인 방형 석실로 변한다. 이러한 양상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진흥왕(眞興王) 18년조[557년]에 “사벌주를 폐지하고 감문국(甘文國)의 고지였던 개령에 감문주를 새로 설치하고 군주 기종을 파견하였다.”라고 하는 기록과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섯째, 모암동 주거지 유적 주변에 다수의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고성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려온 능선의 말단부에 조성된 부곡동 고분군과 평화동 고분군의 규모를 감안할 때, 이 지역의 중심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또 김천시 남쪽에 솟아 있어 김천시를 감싸는 고성산 정상에 산성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한편, 삼한 소국 중의 하나인 감문국이 김천시 개령면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 일찍부터 세력 집단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암동 주거지 유적을 형성한 집단과 감문국과의 관련성은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