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7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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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命純 |
영어음역 | Bae Myeongsun |
이칭/별칭 | 수초(遂初),충숙(忠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우 |
출생 | 15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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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624년 |
몰년 | 1636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
묘소|단소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계상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산(星山) |
대표 관직 | 덕원도호부사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수초(遂初). 할아버지는 효숙공(孝肅公) 배흥립(裵興立)이고, 아버지는 배시망(裵時望)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다. 아들로 배상경(裵尙瓊), 배상행을 두었다.
[활동 사항]
배명순(裵命純)[1597~1636]은 지금의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남달라 장차 후일에 이름을 남길 것이란 말을 들었다.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청의 선전관이 되었고, 1627년(인조 5) 홍경원(弘慶院)을 천장할 때 여재관으로 참여하여 상을 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생하여 인조가 강화도에서 위사(衛士)를 모집하여 후금을 치려 할 때 안릉(安陵)에서 후금 군인 300명의 목을 베는 공적을 세워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에 승진하였다. 보성군수로 나아가 외직에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 뒤 절충장군(折衝將軍)·함경북도병마우후(咸鏡北道兵馬虞候)·덕원도호부사(德源都護府使)를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영장(營將)이 되어 남도절도사(南道節度使)를 따라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다. 이때 왕은 40여 일간 남한산성에 포위되었으나, 양근(楊根)에 집결한 원수(元帥)와 남북절도사들은 청나라 군사를 두려워하여 진격하지 않았다. 이에 배명순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주장(主將)이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화의가 성립되고 왕이 궁으로 돌아왔으나, 배명순은 철수하는 청나라 군대를 철령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겼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안변의 남산역(南山驛)까지 추격하였으나 피로에 치진 병사들이 매복한 청나라 병사들의 기습을 받아 패하였고, 선봉에서 맹렬히 맞선 배명순도 역부족으로 전사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계상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병자호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순절공신(殉節功臣)이 되었고,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