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794 |
---|---|
한자 | 張志道 |
영어음역 | Jang Jido |
이칭/별칭 | 반곡(盤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병우 |
출생 | 1371년 |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
사당|배향지 |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445-1 |
유허비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
정려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인동(仁同) |
대표 관직 | 교서소감 |
[정의]
고려 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반곡(盤谷). 아버지는 경상도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낸 장을포(張乙浦)이고, 큰아버지는 운봉현감(雲峰縣監)을 지낸 장을해(張乙海)이다. 후손은 없다.
[활동 사항]
장지도(張志道)[1371~?]는 김천시 지례면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절의가 굳었다. 공민왕 때 향시에 합격하고 곧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기거주지의주사(起居注知宜州事)가 되어 명망을 얻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5년(태조 4) 교서소감(校書少監)인 그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정하게 하였다. 장지도는 예조의랑으로 있던 정혼(鄭渾)과 함께 교정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으나 왕자들의 권력 싸움으로 골육상쟁을 목도하면서 정치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김천 지례현으로 낙향해 은거하였다.
장지도는 지례현 반곡에 머물며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고, 지역의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騭) 등 훌륭한 제자를 길러 지례현의 문풍을 진작하였다. 지례의 반곡석상에는 장지도의 시가 남아 있는데, 고려에 대한 절의와 조선에 대한 반감이 은근하게 배어 있다.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제자들이 부모의 예로 모시어 3년간 여막 생활을 하였다.
제자인 윤은보와 서즐은 평소 스승이 후사가 없으니 우리가 마땅히 무덤에 여막을 짓고 3년간 마쳐야 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들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현관(玄冠)·요질(腰絰)로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몸소 밥을 지어 전물(奠物)을 준비하였다. 윤은보는 이때 아버지가 병환이 있어 집으로 돌아가 구환하였으나 잠시도 웃옷을 벗지 않았고, 아버지가 쾌차하자 곧바로 스승의 묘소로 돌아와 여막 생활을 하였다.
시묘살이를 하던 중 윤은보는 부친상을 당하자 부모님의 여막 생활을 하였지만, 스승을 위해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제를 올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 서즐은 홀로 스승의 묘소에 여막을 짓고 3년간 기거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귀감이 되었다. 이들의 효행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지례는 예향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1432년(세종 14) 왕은 이들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고, 지례에 스승인 장지도와 제자 윤은보, 서즐의 행실이 함께 정표된 ‘삼효정려비’를 내렸다.
[상훈과 추모]
섬계서원에 배향되었고, 유허비가 김천시 지례면 들머리에 있다. 삼효정려비와 비각이 유허비와 나란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