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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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善門 |
영어음역 | Choe Seonmun |
이칭/별칭 | 경부(慶夫),동대(東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호동 |
활동 | 14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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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 1455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
사당|배향지 | 경상북도 김천시 성내동 경렴서원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화순(和順) |
대표 관직 | 공조판서 |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경부(慶夫), 호는 동대(東臺). 증조할아버지는 최유(崔濡)이고, 할아버지는 최원지(崔元之)이며, 아버지는 중부령 최자강(崔自江), 어머니는 진주 강씨이다. 부인은 김명리(金明理)의 딸이다. 아들로 최한공(崔漢公), 최한후(崔漢侯), 최한백(崔漢伯), 최한번(崔漢藩), 최한남(崔漢南)을 두었다. 가계가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의 ‘최선문유사(崔善門遺事)’와 최자강묘표(崔自江墓表)에 실려 있다. 이 가문은 화순 토성에서 고려 말에 상경 종사하여 사족이 되었다가 15세기 초 최원지가 부인 해안 백씨를 따라 금릉[김산]에 와 살면서 영남 사림이 되었다. 최선문(崔善門)[?~1455], 최선복 대에 와서는 청환(淸宦)을 역임하였고 세조 등극에 반대하여 낙향하는 등 전형적인 사림의 기질을 지닌 가문이었다.
[활동 사항]
최선문은 금릉의 하로리(賀老里)[현 김천시 양천동]에서 태어났다. 지조가 높고 행동이 고결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같은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인 하로리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421년(세종 3) 아버지의 명으로 사헌부지평을 제수 받았으나 다시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공조판서로 재차 부르자 벼슬길에 나아갔다. 왕을 섬기는 데 부모 섬기듯 하고 정사에 성실하니 문종도 대소사를 최선문과 의논하였다. 문종은 최선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하사할 정도로 신임을 표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나이 어린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세조가 최선문의 명망을 알고 의정부좌찬성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언으로 명정에 이 직함을 쓰지 말라고 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종직은 최선문에 대해 “송죽 같은 지조요, 물과 달 같은 정신을 갖고 있다.”라고 찬시하였다. 최선문의 성리학설을 비롯한 문집 2권이 있었으나 소실되었고, 김종직이 찬한 신도비 역시 무오사화 때 실전되어 학문과 사상을 엿볼 수 없다. 최선문은 “형은 화애하고 동생은 공순함이 가정의 화평이요, 성인의 훈계는 분명 떳떳한 도리를 도우리. 우리 최씨 세세의 덕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성관을 하사받을 때 모름지기 보거라.”라는 내용의 계자손문(戒子孫文)[자손들에게 경계의 뜻을 전하는 글]을 남겼다.
[상훈과 추모]
세조는 김종직 등 신진 사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최선문이 세상을 떠나자 예관 유호인(兪好仁)을 보내 사제(賜祭)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하고, 문혜(文惠)란 시호를 내렸다. 뒤에 숙모전에 배향되고 김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향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