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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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阿道和尙 |
영어음역 | Adohwasang |
이칭/별칭 | 아도(我道),아두(阿頭)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남정원 |
[정의]
삼국 시대 경상북도 일원에서 활동한 승려.
[가계]
법명은 아도(我道)·아두(阿頭).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240~248년[위나라 정시 연중]에 고구려 사람인 어머니 고도령(高道寧)과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던 조위인(曹魏人) 아굴마(我堀摩) 사이에서 태어났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서축(西竺)[인도] 사람이라고도 하고, 오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활동 사항]
아도화상(阿道和尙)은 5세 때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출가하여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아굴마를 만나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석(講席)에서 공부한 뒤 19세에 귀국하였다. 263년(미추왕 2) 신라로 가서 왕성의 서리(西里)에 머물렀다. 아도화상이 대궐에 들어가서 불교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였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일선현(一善縣)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살았다.
264년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어 무당과 의원이 치료를 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의사를 구하였다. 아도화상이 대궐로 들어가 병을 치료한 끝에 낫자 왕이 대단히 기뻐하며 소원을 물었다. 아도화상이 천경림에 절을 세워 불교를 크게 일으켜 방가(邦家)[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띠로 집을 덮고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한 뒤 불법을 강연하였으며, 모례의 누이인 사씨(史氏)도 이때 여승이 되어 삼천기에 절을 짓고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얼마 뒤 미추왕이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이 아도화상을 해하려고 하자, 모례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든 다음 문을 닫고 들어가서 자절(自絶)하여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아도화상이 신라 소지왕 때 3명의 시자를 데리고 일선현 모례의 집에 와서 있다가 몇 년 뒤 병 없이 입적하였고, 시자들이 경률(經律)을 강독하여 가끔 믿는 이가 있었다고 하였다.
아도화상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해동고승전』에는 서축 사람이라고도 하고, 오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아도화상을 『삼국사기』 눌지왕조에 등장하는 묵호자와 동일 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김천시의 직지사는 418년(눌지왕 2)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桃李寺)를 개창할 때 함께 지은 절이라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