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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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鶴吉 |
영어음역 | Choe Hakgil |
이칭/별칭 | 최익길(崔益吉),최학광(崔鶴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호상 |
출생 | 18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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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 1879년 |
활동 | 1904년 |
활동 | 1908년 |
활동 | 1919년 3월 |
활동 | 1919년 4월 |
활동 | 1934년 |
활동 | 1935년 |
몰년 | 1937년 |
특기 사항 | 1939년 |
추모 | 1995년 |
추모 | 2008년 10월 30일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639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김천 |
활동지 | 경상북도 김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최학길(崔鶴吉)은 1862년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639번지에서 한학자인 남애(南厓) 최창락(崔昌洛)[1832~186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최익길(崔益吉) 또는 최학광(崔鶴光)으로도 불렸다. 18세에 아버지 최창락을 따라 성재(性齋)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족형인 양오(陽梧) 최봉길(崔鳳吉)[1853~1907]과 함께 사미헌(四未軒) 장복추, 만구(晩求) 이종기에게도 사사하였다. 장복추는 영남 삼징사(三徵士)의 한 사람으로서 공산 송준필 등 40여 명을 문하에 두고 있었다. 이들 문하에서 최학길은 이승희, 장석영, 송준필, 이기형, 장상학 등 성주·칠곡의 유림들과 교유하였다.
1904년 대한제국 궁내부의 통신사 전화과(電話課) 주사에 임명된 최학길은 매관매직과 탐관오리를 척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1908년에는 영남 지역에서 계몽사상을 보급하고 신교육을 진흥할 목적으로 조직된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귀향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는 가운데 영남 지역의 곽종석·김창숙 등과 호서 지역의 김복한 계열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고자 하는 파리 장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최학길은 동향의 이경균, 이명균, 이석균 등과 동참하여 서명했다가 1919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였다.
이후 그는 ‘기은(箕隱)’·‘만수문(萬壽門)’이란 두 편액을 걸고 은둔 생활을 했는데, 1934년 조선총독부가 의례 준칙을 통해 전통적 생활 관습을 통제하려 하자 “춘추대의를 품은 자가 인륜이 끊어져 금수가 되는 지경을 당하여 화가 두려워 말 한 마디 못하는 게 옳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반대하는 글을 조선총독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서 1935년 조선의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쓴 『속수금릉지(續修金陵誌)』가 있다. 아버지 대부터 작성해 온 『명산세고(鳴山世稿)』·『경전연의(經傳演義)』·『사의부주(士儀附註)』 등을 완성했으며, 그의 사후인 1939년 후손들에 의해 『구재선생문집(懼齋先生文集)』이 간행되었다. 가승 일기인 『세장연록(世藏年錄)』은 최경천(崔慶千)[1791~1857], 최창락, 최봉길, 최학길 등 화순 최씨 가문에서 5대에 걸쳐 써 내려온 것이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10월 30일 김천향토사연구회가 주도하여 김천시 조마면 신안4리 남애정에 ‘구재최학길선생추모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