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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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片德烈 |
영어음역 | Pyeon Deokryeo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편덕렬(片德烈)의 집안은 원래 경상북도 김천을 본거지로 살아왔으나 할아버지 대에 황해도 연백으로 이주하였다. 1897년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편덕렬은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의병장이자 대한광복회와 의성단 등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편강렬의 아우이다.
경성에 있는 협성중학교를 졸업한 편덕렬은 3·1운동 이후 형 편강렬의 지시를 받고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되었다. 이후 편덕렬은 난징[南京]의 금릉대학 어학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한편으론 상해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교통국 조사원으로서 황해도 연백 지역을 담당하였다.
1920년 5월 안창호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한 편덕렬은 국내 실정을 조사하고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평양에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4년 3월 출옥한 그는 같은 해 8월 편강렬이 조직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던 의성단 활동과 관련하여 경찰에 강제로 구인된 뒤 취조를 당하였다. 이후 만주로 건너간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1928년에는 반석현(磐石縣)에서 중국에 귀화하기도 하였다. 1943년 9월 여행 경비 등의 문제로 귀국한 편덕렬은 경찰에 구금되어 육해군 형법 위반으로 18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45년 5월 다시 예비 검속에 걸려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편덕렬은 민일당(民一黨) 설립에 가담하여 서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좌우파의 대립 가운데 임정 요인들의 환국을 계기로 전개된 민족진영 세력의 통합 운동인 정당합동준비위원회에 민일당 대표로 가담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의 정치 자금 조성의 배경이 된 대한경제보국회(大韓經濟輔國會) 결성에 참여하여 상담역(相談役)을 맡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