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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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正秀 |
영어음역 | Gim Jeongsu |
이칭/별칭 | 김봉안(金鳳安),김봉안(金奉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호상 |
출생 | 1889년 8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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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 1905년 |
수학 | 1911년 |
활동 | 1919년 6월 |
활동 | 1957년 1월 |
몰년 | 1959년 2월 19일 |
추모 | 1995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48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김천|대구 |
학교|수학지 | 경상북도 김천 |
활동지 | 경상북도 김천|대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3·1 만세 시위 |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정수(金正秀)는 1889년 8월 18일 경상북도 김천군 아포면 송천리 48번지[현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48번지]에서 태어났다. 1905년 지역 아동의 교육과 전도를 목적으로 송천교회에서 설립한 양성학교(養性學校)에 입학하여 1911년 졸업하였다. 이후 김정수는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미국 선교사 안의와 목사가 설립한 성경 학교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다.
1919년 3월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대구에서도 3·1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대구 남성정교회 목사였던 이만집은 의성 출신의 조사 이태학을 통해 대구성경학교 성경 강습회에 참가하고 있던 교계 지도자와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에 참여해 달라고 독려하였다. 이에 김정수는 같은 해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에 다른 성경 학교 학생들과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10월 12일 출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정수는 1924년 모교회인 송천교회에서 송병근과 함께 장로로 선출되어 시무했다. 또한 미국 선교사 부해리(傅海利)[본명 Henry Munro Bruen]를 도와 권서로서 인근 지역에서 전도 활동을 했으며, 자신이 졸업한 양성학교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1957년 1월 교회 사정으로 장로직을 사임한 후 1959년 2월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