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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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呂永祚 |
영어음역 | Yeo Yeongjo |
이칭/별칭 | 여영소(呂永昭),일재(一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의병·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여영조(呂永祚)는 1862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여영소(呂永昭)로도 불렸다. 호는 일재(一齋)이다. 일제의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에 맞서 안동의진과 진주의진이 대일 항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인 1895년 12월 통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1896년 여영조는 허위·조동호·여중룡 등과 재차 금릉향교에서 창의하여 경상도 서북부 지역의 상주·선산·성주·김산·개령 등지 양반 유생들의 연합 의진으로 김산의진(金山義陣)을 결성하였다.
김산의진은 김천 장날 읍으로 들어가 수백 명의 장병을 모집하고 김산군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는 등 진용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했지만 지도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상호 불신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태에서 대구부로 진격하던 김산의진은 3월 14일 대구부에서 파견된 관군과 전투를 벌여 패배한 후 괴멸되었다. 3월 25일 여영조는 허위 등과 상주·선산 등지로 통문을 돌려 김천 직지사에서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진주의 노응규 등과 합천·거창 등지의 의병과 연합하여 진용을 재정비했으나 부족한 무기와 향리 백성들의 배척 등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무너졌다.
을미년에 일어난 의병이 해산한 후 많은 유생들이 상경하여 의병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관직에 나아가기도 하고, 일부는 서울에서의 활동을 통해 사상의 변화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여영조는 1902년 구휼 기관이었던 혜민원의 주사를 거쳐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청원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904년 허위·여중룡·이건석·우용택 등 을미년 의병에 참여했던 재야 유생층이 주도하고 이들과 연계된 서울의 관료들에 의해 충의사(忠義社)가 조직되었다. 충의사는 황실(皇室)의 강녕(康寧), 민명(民命)의 보호, 군제의 초연(抄鍊) 인재의 교육 등 현재의 급무에 힘을 써 자강지책을 강구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충의사에 가담하여 배일 언론 투쟁을 적극 전개하던 여영조는 1905년 나인영·오기호 등과 을사 오적을 처단하려 시도했으나 사전에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여영조는 계몽 운동에 가담하여 1906년 이후 서울에서 대한자강회와 교남학회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여영조는 윤충하·권상익 등과 기존의 개동교(開東敎)를 태극교로 확대 개편하였다. 태극교의 정식 명칭은 태극교종교회 혹은 태극교종이다. 태극교는 을사 오적 암살 계획 등에 참여했던 개신 유림들이 개항기 정치적 제약 상황에서 유교 문화 수호 및 국권 회복을 모색하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
태극교의 핵심은 경의부장(經義部長) 윤충하와 교정(敎正)을 맡은 여영조였다. 대표직인 교장은 명예직이었으며, 여영조는 교정으로서 태극교의 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 관리하였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여영조는 독립의군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