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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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舜在 |
영어음역 | Jo Sunj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손경희 |
활동 | 18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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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894년 9월 25일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 |
활동지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 |
성격 | 동학 농민군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봉계 동학 접주 |
[정의]
개항기 김천 출신의 동학 농민군.
[개설]
1894년 5월 초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했으나 무장을 풀지 않고 각기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가 세력을 유지했다. 이후 일본군과 청군의 철수를 재촉하기 위해 정부 측에서 동학교도들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전라감사 김학진도 역시 같은 태도를 보이게 되자 각 지역의 동학 세력은 급격히 팽창했다. 특히 7월 초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 간에 집강소 설치가 공식 합의되고 개화파의 신분제 개혁 조치가 고을마다 전파되면서 신분상으로 평민·천민에 해당하던 이들이 대거 동학에 들어왔다. 또 1차 봉기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북접 계통의 호남 접주들도 이 시기에 이르면 대세에 이끌려 각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이른바 ‘구도(舊道)’ 도인들의 조직을 공개했다.
1894년 김산 지역에서는 도집강 편보언(片輔彦)이 8월 6일 김천 장터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접사(接司)·대정(大正)·중정(中正)·서기(書記)·교수(敎授)·성찰(省察) 등 유사(有司)를 분정하여 유덕(有德)을 하면서 농민군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호서·영남 지방까지 확산되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등장한 유력한 접주 가운데는 양반층과 지주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활동 사항]
조순재(曺舜在)는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에서 태어났다. 김산의 양반이었던 조순재는 동학의 김천시 파미면 봉계[현 김천시 파미면] 접주로 임명되었다. 조순재는 “이 도(道)[동학]에 들어오면 난을 피할 수 있고, 기아를 면할 수 있으되, 입도(入道)하지 않은 자는 모두 죽는다.”고 하면서 하층민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894년 9월 25일 북접 최시형으로부터 김천 도집강 편보언에게 기군령(起軍令)의 통지가 왔다. 이에 김산군 봉계에서는 조순재가 군사를 일으켜 양곡과 군마를 모으고 칼과 창 등의 군기를 갖추었다. 이들은 백성들로부터 강압적으로 군수적 및 포를 거두었으며, 군사를 일으킴과 동시에 인근 지역을 공략했다. 김산군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대구의 남영병(南營兵)을 맞아 교전을 벌였다.
그 해 9월 26일 경상감사 조병호가 병방(兵房) 박항래(朴恒萊)와 영관(領官) 최처규(崔處圭)로 하여금 남영병 200여 명을 이끌고 선산 및 김산 쪽을 향해 진군토록 했다. 이 부대가 인동·선산·개령을 거쳐 김산에 도착한 것은 10월 5일이었다. 그러나 김천에서는 큰 공방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편보언이 도피하자 농민군은 곧 퇴산하게 되었다. 이후 이 지역에 대한 관군 및 일본군의 토벌이 진행되었다.
우선 대구 남영병을 이끌고 들어온 영장 최처규는 농민군을 격파하고 접주를 섬멸하되, 위협을 받아 강제로 농민군에 들어간 자들은 석방토록 한 경상감사의 지시에 따라 접주 및 ‘유죄자(有罪者)’들에 대해서는 명단을 만들어 게시하여 공개적으로 수색, 체포하고 처형해 나갔다. 당시 조순재는 김산 소모사(召募使)로 있던 일족 조시영(曺始永)의 도움으로 처형을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