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947 |
---|---|
한자 | 金聖學 |
영어음역 | Gim Seonghak |
이칭/별칭 | 알렉시오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고수철 |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에서 활동했던 천주교 사제·교육자.
[개설]
1880년대에 이르러 조선 왕조는 쇄국 정책을 중단하고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에 따라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면서 각 교회들은 포교 활동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 대한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학교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당시 천주 교회에서도 조선 교구를 통괄하던 귀스타브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한국명 민덕효(閔德孝)] 주교가 각 지역 신부들에게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1899년 10월 12일 경상북도 가실(嘉實)[지금의 왜관 남쪽]에 세워진 가실본당 주임신부로 있던 김성학(金聖學)이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 “……그래서 언젠가 주교님께서 학교를 세우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을 때 학교를 세울 만큼 아이들이 많지 않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활동 사항]
김성학은 1870년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알렉시오이다. 1883년(고종 20) 천주교 조선교구 교구장이던 블랑(M. J. Blanc) 주교의 주선으로 강도영(姜道永)·강성삼(姜聖參) 등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로 가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1892년 귀국하여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신학을 계속 공부했고, 1897년 한국인으로서는 여덟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01년 4월 27일 김천본당[현 김천황금성당]으로 발령을 받은 김성학은 6월 10일에 김천에 도착하여 본당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 8월 20일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근 이곳에 학교를 설립했고 외교인들은 저를 박학한 사람으로 존경하고 있는 터입니다.”라는 내용에서 밝힌 것처럼 1901년 8월경에 학교를 개설하였다. 당시 보고한 교회의 공식 문서에는 학생 수가 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가 1908년「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을 제정 공포하여 교육 운동을 탄압하는 와중에도 1909년 6월 27일 새 학교 건물로 6칸짜리 기와집을 지었고, 1910년 7월경 학교 인가를 받았다. 당시 학교의 정식 이름은 ‘사립 천주교 성의학교’로, 수업 연한은 초등과(初等科) 4년, 고등과(高等科) 4년이었다. 1911년 2월에 여성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여학교를 설립하여 김천 지역 교육의 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1년 6월 1일 인사이동에 따라 서울교구에서 관할하는 황해도 장연본당으로 전임되었고, 학교는 김문옥 신부가 운영하였다.
김성학은 1916년부터 6년간 용산신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쳤다. 1922년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메리놀외방전교회로 관할권이 이양되는 평안도로 파견된 후 1년간 임시로 전교하다가 1923년 평양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27년 평양교구가 설정되면서 영유본당 주임으로 옮겼다. 1931년에는 신설된 서포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14년간 평안도에서 활동한 후 1936년 아산의 공세리성당 주임을 맡아 서울교구로 복귀했다가 1938년 9월 8일 뇌출혈로 선종하였다.
[묘소]
묘소는 대전가톨릭대학교 내 대전교구 성직자 묘지[하늘 묘원]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