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김철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984
한자 金喆安
영어음역 Gim Cheola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근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912년 4월 4일연표보기
활동 1930년연표보기
활동 1932년경연표보기
활동 1946년연표보기
활동 1954년연표보기
활동 1958년연표보기
몰년 1990년연표보기
출생지 대구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김천시 황금동
활동지 경상북도 김천시 황금동
성격 여성 정치인|국회의원
성별
본관 김해(金海)
대표 경력 제3·4대 국회의원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활동한 여성 정치인.

[활동 사항]

김철안(金喆安)은 1912년 4월 4일 김영순의 2녀 중 큰딸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계 때문에 어머니를 따라 영덕으로 갔다가 영덕소학교를 졸업하고 18세인 1930년 김천으로 왔다. 금릉학원 부설 금릉유치원 선생[보모]으로 취직한 김철안은 유치원 보모 시절인 1932년경 황상덕이 관여하는 중앙근우회 김천지회에 가입했다. 22세인 1934년 최의원(崔義元)과 결혼했는데, 당시 시댁에서 신여성이라면서 결혼을 반대했으나 김철안은 밭에 나가 농사일을 거드는 등 강한 의지로 결혼에 성공했다.

광복 후 좌익의 김천청년동맹이 부녀동맹 김천지부를 결성하여 김철안에게 가입을 종용했으나 일축하고 1946년 우익계인 한국애국부인회 김천지부를 조직하고 지회장을 맡았다. 1938년 김철안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김천 갑구 선거구에서 한국애국부인회 소속으로 네 명의 후보와 입후보했다가 3위로 낙선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금릉군 선거구에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입후보했다가 차점으로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금릉군 선거구에 여당인 자유당 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여섯 명의 입후보자를 물리치고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처음 열리던 국회에서 발언권을 얻어 단상에 오른 후, 느닷없이 「애국가」를 불러 주위의 관심을 집중시켜 놓고 능변(能辯)으로 신상 발언을 다하고 자리로 돌아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역시 자유당 공천으로 금릉군 선거구에 입후보하여 세 사람의 입후보자를 제치고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1959년 부항면 청사 이전 분규는, 김철안이 부항면의회에서 의결 정족수가 3분의 2에 미달됐는데도 4사5입을 적용하여 정부 승인을 받고 무리하게 면사무소를 주민 수가 많은 윗마을 쪽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일로 당시 “국회의원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등 말이 많았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금릉군 선거구에 김철안 등 열네 명의 후보자가 난립하여 무소속 우돈규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는데, 당시 김철안은 최하위로 낙선되어 정치판을 떠났다. 김철안은 국회의원 시절 청와대 출입이 잦아 ‘이승만의 수양딸’이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