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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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蠶業 |
영어음역 | Jameop |
영어의미역 | Sericulture |
이칭/별칭 | 양잠업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채장수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의 산업 중 누에를 사육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업종.
[변천]
경상북도 김천시에서는 남면 부상리(扶桑里), 대항면 복전리 등지를 중심으로 한때 양잠업이 번성하였다. 특히 김천시 남면 부상리는 신라 시대부터 불린 지명에 걸맞게 뽕나무밭이 많았으며, 속칭 ‘번데기들’이라고 불리는 들녘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이다. 김천에서는 1914년에 누에의 품종을 바꾸고, 1919년에는 이를 1대 교잡종으로 대체하여 생산량이 증가되었다. 이에 1929년 김천에 대규모 잠사 공장 건립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했으며, 대신 소규모의 생사 공장이 4~5개소 정도 건립되었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고치로 생사를 뽑아 명주를 짰고 광복 후에도 1230호에서 명주를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통계에 의하면 1930년 김천군의 잠업 종사자는 692명으로 총 인구의 0.5%, 경제 활동 인구의 1.2%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을 여성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잠업은 농가의 부업 수준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 후반부터 김천의 잠업은 식량 증산에 밀려 쇠퇴하였고, 그 상태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면서 뽕밭이 관리 소홀과 병충해로 황폐해졌다. 뒤이은 6·25전쟁으로 양잠업은 더욱 쇠퇴하였고 1929년에 375톤이었던 금릉군 잠견 생산량이 1951년에는 42톤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이후 1962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잠업 진흥책으로 1965년에는 생산량이 716톤으로 늘기도 했지만, 일본의 한국산 생사 수입 제한으로 다시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에 1970년대부터 김천은 생사 수출 대신 견직물을 주조하여 세계 시장에 수출하였다. 이와 더불어 잠업의 전반적인 침체 속에서 뽕밭의 상당 부분이 자두밭과 포도밭으로 전환되었고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산업 구조 개편과 농가의 노동력 부족 등으로 잠업은 더욱 쇠퇴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명맥조차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현황]
통계에 의하면 김천의 양잠 및 기타 가구는 2000년 29가구[0.2%], 2005년 8가구[0.0%], 2007년 22가구[0.2%] 정도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쇠퇴하고 있는 잠업의 활성화를 위해 김천시에서는 2008년 양잠 산업 육성 지원 사업, 2010년 봄 애누에 공동 사육비 지원 사업 등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양잠업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2008년 경상북도의 오디[뽕나무의 열매] 육성 정책도 김천의 양잠업에 간접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김천시의 주요 잠업 관련 기관으로는 김천시 대덕면 문의리에 있는 김천양잠영농조합법인을 들 수 있다.
[의의와 평가]
1980년대 이후로 김천에서는 잠업 전업농가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 이에 잠업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 수립과 함께 오디 육성과 같은 관련 부가 가치 영역의 업종 개발이 요청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