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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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社會運動 |
영어음역 | Sahoe Undong |
영어의미역 | Social Movement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용재 |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사회 변화를 일으키거나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전개하는 운동.
[개설]
김천 지역의 사회운동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민족의식이 고취되고 사회 문제에 대한 농민, 노동자, 청년의 각성이 일어나는 시기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초기의 사회운동은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한 직접적 무장 투쟁의 일환으로 발생하였고,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민족 자강과 애국 계몽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었다.
노동 운동과 같이 계급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운동의 경우에도 민족 위기에 대한 각성을 시작으로 민족적 위기와 계급적 위기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사회운동이 심각한 좌우익 대립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독립 국가 수립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체에 대한 갈등에 기초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 김천 지역의 사회운동은 크게 금릉농우동맹을 중심으로 한 농민 운동과 김천노동조합을 효시로 하는 노동 운동, 그리고 금릉청년회를 중심으로 하는 청년 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농민 운동]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은 대부분이 소작농이자 피지배 계층으로 사회적 불합리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계층이었다. 이들 농민의 사회운동은 불합리한 소작 제도의 개선이나 사회적 억압 구조의 해체 혹은 변혁을 위한 집단적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린 이후 실시된 토지 조사 사업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한데다 1920년부터 추진된 산미 증산 계획에 따라 소작농이 크게 증가하게 되면서 전 국민의 46.5%가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특히 일본인 지주에 의해 소작료 명목으로 50~60%를 수탈당하는 등 농민에 대한 억압은 더욱 심화되었다.
1926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에 김천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작인이 전년 대비 3배가 넘는 소작료를 징수당해 항의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일본인의 횡포가 심하였다. 이에 1923년 풍기의 소작인들이 쟁의를 벌여 소작료는 50% 이하로 할 것, 지세 및 기타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할 것, 지주는 무상으로 소작인을 인부[잡역]로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내의 소작 쟁의 발생 건수는 1922년에는 3건의 소작 쟁의가 발생했으나 1932년에는 300건, 1933년에는 1975건, 1935년에는 2만 5834건, 1937년에는 2만 9975건으로 급증하였다. 김천 지역에서는 1927년 4월 17일 금릉면에서 금릉농우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일본인의 송강은행 소유 토지 소작인 100여 명이 금릉농우동맹 후원으로 소작 쟁의를 일으켰다.
1934년에는 쟁의가 특히 치열하여 1월부터 5월 사이에 80여 건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소작 쟁의는 일반적으로 별도로 조직된 소작위원회에서 조정하였는데 80건 중의 절반이 조정·해결되었다. 이 밖의 김천 지역의 농민 단체로는 개령농우회, 남면농우회, 봉계농우회, 김천농사개량계가 있었다.
[청년 운동]
우리나라 청년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부터 일어났다. 일본의 국권 병탄에 항거하는 무력 투쟁이 치열했으나 일본의 강력한 군사력을 이겨낼 수 없게 되자 전국에서 청년운동을 통해 민족의 동량을 양성하여 장기적으로 국권 회복 운동을 펴나가기 위한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김천 지역의 청년운동 단체는 1918년 일본인들이 그들의 신변보호책으로 조직한 청년 단체인 김천청년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청년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 국권 회복을 위한 동량 양성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21년 8월 29일 고덕환(高德煥)을 중심으로 조직한 금릉청년회가 그 시작이다. 금릉청년회는 1922년에 당시로는 거금이었던 1만 원을 모아 청년회관을 건립하고 교육 사업으로 금릉유치원과 금릉학원을 운영하였다. 또한 근로 여성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야학을 운영하면서 매주 강연회와 토론회를 실시하고 여성·가정·사회 문제 등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이는 등 당시로는 선진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928년에 금릉학원은 팽창된 학원 실상에 비해 재정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경상북도 도 당국에 의해 폐쇄 조치를 받았다. 이에 대하여 김천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여론이 비등하게 되면서 6개월 뒤에 폐쇄령이 철회되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릉학원은 결국 폐쇄 상태로 광복을 맞았고 1950년 6·25전쟁 중에 건물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 외에 해방 이전의 김천 지역 청년운동 단체로는 1925년에 창립되어 1926년에 김천청년회, 김천여자청년회, 아천청년회, 개경청년회 4개 단체를 통합한 김천청년동맹, 1926년에 창립한 김천형평청년회, 금릉구락부, 김천철육회, 김천교풍회, 김산청년회, 김천청년동맹, 김천동맹금릉지회, 경북청년동맹, 김천기독교청년회, 김천청년회의 후신인 김천청년동맹 김천지회 등이 있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좌우익의 대립이 사회적 긴장을 야기하였고, 이러한 대립은 청년운동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5년에 김천에서는 좌익을 중심으로 한 김천청년동맹이 조직되었고, 이에 대항하여 우익 진영에서도 김천청년회를 조직하여 이들 좌우익 사이에 폭력 대립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군정이 진주함에 따라 1947년에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이범석(李範奭)이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하였는데 이에 따라 김천에서도 김천지부단이 조직되어 청색 단복을 갖추고 훈련소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48년에는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좌익 온건파를 표방하는 노동인민당 노선에 따라 각지에 청년 단체를 조직하였다. 김천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김천민주애족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1949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지시로 국내 청년 단체가 통합되어 대한청년단이 되었다. 이에 따라 김천에서도 1949년 10월 19일에 대한청년단 김천지부단이 조직되었다. 그 이후에 김천 지역에서는 불교 청년단, 기독교 청년단을 비롯한 특수 단체 이외의 청년 단체는 결성되지 않았다.
[노동 운동]
일반적으로 노동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이 노동 조건이나 생활 조건의 개선을 비롯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지위의 향상 도모를 목적으로 전개하는 운동으로 노동자 계급의 성장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1911년 일제에 의한 토지 조사 사업의 여파로 약 5만 명이 농토를 잃고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한 이래 그 수가 1931년에는 14만 명, 1933년에는 25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925년경부터 노동자 계급이 노동 단체를 조직하고 노동 쟁의를 일으켰으며, 소작 쟁의와 같이 1930년대를 그 절정기로 하고 있어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운동이자 사회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천에서의 노동운동의 효시는 1921년 10월 2일 김천시 남산동 한중경 집에서 한중경·추웅천 등이 주동이 되어 김천 거주자 중 18세 이상 남자를 회원으로 하고 물품 향상, 지식 계발, 실업 연구, 풍속 개량을 당면 과업으로 선언하면서 창립총회를 열고 조직한 ‘김천노동조합’이다.
1926년 1월 25일에는 김천 지역 자동차 운수업 종사자들이 회원 상호간의 상부상조와 단결, 교양과 인격 수양 등을 목적으로 한 윤우구락부(輪友俱樂部)라는 노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 4월 16일에 김천 역전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마루다운송점’ 작업 인부 20여 명의 월급 감봉에 항의하여 동맹 파업하였고, 1926년 6월 14일에는 ‘가나이인력거조합’에서 인력거 1대 당 주인에게 내는 돈이 다른 인력거 조합보다 높다는 이유로 동맹 파업을 하기도 하였다.
1926년 10월 3일에는 김천의 인쇄직공친목회 창립총회가 금릉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으며 이외에도 많은 노동 단체가 조직되고 노동 쟁의도 뒤따랐다. 이와 같은 노동운동은 주로 노동자들의 자각에 의해 전개되었고 자신들의 권익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1927년 1월 16일에 김천노우회의 혁신 총회가 개최되었고, 2월 22일에는 김천노우회 정기총회 후에 회원 60여 명이 노동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가행진 시위를 결행하였다. 같은 해 6월 30일 김천노우회는 청년연맹을 해체하고 김천청년동맹을 결성하여 면에는 면 지회를, 동에는 반(班)을 두고 노동운동과 노동자 야학의 실시를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1929년에는 이발사들이 노임 인상을 요구하며 동맹 파업하였고, 1931년 9월 20일에는 김천마루보시운송에서도 임금 삭감 문제로 총파업이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이후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제가 국민총동원령을 내리면서 노동운동이 일시 중단된 채 광복을 맞았다.
해방 이후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본연의 성격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였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노동조합이 정비되고 경제 성장이 강조되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시작되어 노동운동은 침체를 겪었다. 1960년 6월 김천에서는 초·중등부 교원 노조가 각각 결성되었다가 1961년 2월에 하나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군사 정권에 의해 교원 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지면서 해체되었다.
이후 1988년 10여 명의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이 교육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면서 김천 지역 교원 노조 운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1988년 12월 10일에 250여 명이 모여 김천금릉교사협의회를 창립했으며, 1989년 5월 28일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설립에 부응하여 7월 7일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김천·금릉지회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정부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체 방침과 함께 김천·금릉에서 6명의 해직 교사가 발생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1997년 12월 「노동조합법」이 개정된 데 이어 1999년 7월 1일 교원 노조가 합법화됨에 따라 현재의 합법적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 외 운동]
1. 감천댐 건설 반대 운동
1996년 8월 8일 지례면민이 감천댐건설반대위원회[위원장 이종상, 뒤에 김만호]를 결성하였다. 8월 19일에는 부항면, 8월 23일에는 구성면에서도 위원회가 차례로 결성되었다. 8월 24일에는 3개 면 연합대책위원회[위원장 이현동·이종상]를 결성하고, 면마다 궐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1997년 4월 25일에는 8만 1847명이 연서한 진정서를 건설교통부에 내고 댐 건설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대책 위원장들은 국회를 방문하고, 청원서를 제출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 지례면의 종교 지도자 30명이 공동으로 댐 건설 반대를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건설교통부장관은 1997년 10월 국회 질의 답변에서 방안을 추진할 것이며, 만일 추진할 경우는 지방 자치 단체와 협의하고 공청회 등 주민 여론을 수렴하겠다고 하였다.
1996년 정부에 의해 댐 건설이 다시 추진되고 있었다. 2004년에도 감천댐 주민대책위원회 회원 50명이 감천댐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2005년 7월 건설교통부는 총 사업비 4191억 원 규모가 투입될 부항댐[감천댐] 건설 사업을 본격화하였다. 7월 22일 건설교통부는 낙동강 유역의 홍수 조절과 용수 공급을 위해 추진 중인 부항댐 건설 사업의 환경 영향 평가 및 관계 기관 협의가 완료됨에 따라 댐 건설 기본 계획을 고시, 착수한다고 밝혔다.
이 사업은 2011년 완공을 목표로, 홍수 시 1200만 톤에서 최대 5200만 톤 이상의 물을 저장함으로서 경상북도 김천시의 홍수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2010년 현재 추진되고 있다.
2. 한 자녀 더 갖기 운동
2009년 6월 17일 창립된 한 자녀 더 갖기 운동연합 김천시지부 저출산 문제에 관한 조사·연구·자문·지원과 출산에 대한 긍정적인 사회인식 변화를 위한 캠페인, 저 출산 문제 극복을 위한 세미나 및 토론회 개최, 다자녀 가정 및 다문화 가정에 대한 지원, 임신·출산·양육·보육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 및 지원, 출산 장려를 위한 기업의 환경·제도 보완 촉구, 출산 장려를 위한 정부의 법·제도 및 조례 제·개정 촉구와 지원 등과 관련된 사업과 업무를 행하고 있다.
3. 새마을 운동
김천 지역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75년으로 1970년대 초부터 산발적으로 벌어지던 새마을 운동이 1975년에 들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김천 지역의 초기 새마을 운동은 농촌 환경 개선 사업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 전체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가 무상으로 지원되어 마을 진입로 정비, 공동 우물, 빨래터, 퇴비장, 소류지가 정비되었다. 1972년 마을 가꾸기와 지붕 개량, 마을 금고 육성, 농로 개선 사업을 통해 새마을 운동의 생활화, 소득화, 지속화에 집중하였다. 1973년에는 새마을 운동의 종합적인 체계화를 기본 방향으로 하천과 국토 대청결, 생산 시설 사업, 소득 개발 사업을 전개하였다. 1974년에는 새마을 운동의 자율적 확대와 마을 단위 광역 협동 사업을 목표로 새마을 시민 교육과 지역 협동권 사업을 전개하였다. 1975년에는 경제 난국 극복과 도시 새마을 운동 전개를 목표로 소득 기술 교육 강화와 협동권 사업을 확대하였다. 1976년에는 낙후 마을에 대한 집중 육성에 그 방향을 두고 부진 마을 집중 지원과 범국민 저축 운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에는 새마을 자립 기반의 완성을 목표로 농외 소득원 개발과 반상회 운영 강화, 직장 새마을 운동을 강화하였다. 1978년에는 선진 농촌 구현을 위해 생산 소득 기반 확충과 공장, 직장 새마을 운동 확산에 주력하였다. 1979년에는 미래지향적 농촌 건설을 위해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3대 질서 운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1970년대 이래 정부 주도로 추진해 온 새마을 운동을 순수한 민간 주도로 전환, 추진하기 위해 1980년 12월 1일 새마을 운동중앙본부가 창립되었다. 1983년 시군에 지회가 설치될 때 김천시지회가 설립되었고 1989년 4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김천시지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2년 12월 김천시 감호동 17번지에 새마을회관을 건립하고 1995년 1월 김천시와 금릉군의 통합에 따라 새마을운동 김천시지회로 통합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새마을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이었다면 이제는 녹색 성장에 따른 더불어 잘 사는 운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새마을운동 김천시지회는 2010년 독거 노인 효사랑운동, 범시민 자전 거타기 대행진, 4대강 하천 살리기, 사랑의 집 고쳐 주기, 남의 말 좋게 하기, 폐자원 모으기, 사랑의 쌀 전달, 1만 포기 김장 담가 주기 운동 등을 통해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친환경 녹색도시 김천 만들기에 앞장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