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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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泉靑年同盟 |
영어음역 | Gimcheon Cheongnyeon Dongmaeng |
영어의미역 | Gimcheon Youth Leagu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설립 목적]
김천청년동맹은 개인의 수양, 신교육 보급, 풍속 개량, 농촌 개량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변천]
1921년 8월 김천군에서 결성된 금릉청년회는 1923년 3월 문화계몽운동에서 사회주의적 노선으로 전환을 시도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가하였다. 1924년 4월에는 청년 운동의 전국 지도 기관으로 결성된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였다. 이를 계기로 금릉청년회는 혁신 총회를 통해 대중 운동에서 청년 운동의 선도성과 무산 청년 운동을 강조하였다.
1925년에 금릉청년회는 개령청년회와 합쳐 김천청년연맹을 결성하여 김천군의 청년 운동을 단일 대오로 만들고자 하였다. 같은 해에 김천청년연맹은 경상북도 지역의 청년 운동 지도 기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안동에서 개최되는 경북노동운동자간친회에 맞서 상주에서 개최되는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에 참가하였다. 1925년 11월에는 대구청년동맹이 발의한 경북청년연맹발기대회에 참여하였다.
1926년 김천청년연맹은 김천 지역 사회단체와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김천 각 단체 통일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청년 운동의 강화, 운동 단체 간의 연대 강화 등이 주로 논의되었다. 1927년에는 김천에서 전국의 청년 운동 흐름에 맞추어 김천군의 청년 단체를 하나로 묶는 김천청년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이는 청년 운동을 무산 계급 청년 운동에서 전 민족적 청년 운동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김천청년동맹 결성 이후 기존의 청년회는 김천청년동맹의 지회로 개편되었다. 1928년 1월 김천청년동맹은 경상북도 지역 청년 운동의 지도 기관으로 경북청년연맹을 결성하기 위한 경북청년운동자 간친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김천청년동맹의 홍보용과 황태성이 경북청년연맹의 집행 위원장과 집행 위원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금릉청년회의 조직은 덕육부, 지육부[교육부], 문예부[학예부], 체육부, 풍속부, 산업부[실업부] 등의 부서로 편성되었으며 주도층은 지방 유지와 청년 지식인 등이었다. 지방 유지들은 대체로 지주 상공인, 지식인 등이었으며 청년회 운영을 위해 재원을 마련하고 직접 운영에 참여하였다.
금릉청년회는 1923년부터 청년회 운영으로 학교 형태의 금릉학원을 열고 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결성되자 청년회 주도로 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토산품 장려, 금주 단연, 소비 절약 등을 실시하였다.
1925년에는 당시 『조선일보』 김천지국장이 언론 사업을 빙자하여 기독교 전도 사업 활동을 벌이면서 발생한 사회 문제에 대해 지역의 다른 사회단체와 함께 『조선일보』 비매 동맹을 결성해 대응하였다. 1926년에는 김천의 사회 문제로 떠오른 김천곡자[누룩]조합 분쟁에도 개입하여 조선인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벌였다. 군 당국이 조선 재래 누룩의 제조를 폐지하기 위해 취한 누룩 제조업을 폐업시키자 금릉청년회가 시민대회를 개최하여 군 당국의 조치에 대응하였고 결국 군 당국의 폐업 조치 철회를 이끌어냈다.
김천청년연맹은 청년 대중의 계급적 자각, 대중 운동 활동가 양성, 봉건 풍습 타파 등을 주요 활동 방향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강연회, 토론회, 독서회, 강좌회 등을 실시하였다. 또한 금릉청년회 때부터 운영해 오던 금릉학원을 계속 운영하였고 청년 여성의 활동을 위해 금릉여자청년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김천청년동맹은 수양 기관 또는 문화 운동의 중심 기관임을 표방하고 수양을 위해서는 지·덕·체의 함양을, 사회 개조를 위해서는 문화 향상·봉건사상 타파·산업 장려 등을 목표로 했으며 청년회 회원이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 권고문을 만들어 보급하였다.
김천청년동맹은 일제가 사립학교령에 위배된다는 구실로 금릉학원을 강제로 폐쇄시키자 김천 지역의 각 사회단체와 연대해 복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방법으로 주요 단체에 사태의 전말을 알리고 비판 연설회와 시민대회를 개최했으며 주요 신문사에 논설 게재를 요청하는 활동을 벌였다. 김천청년동맹은 독립운동의 지도 기관으로 만들어진 신간회 운동에도 참여하여 신간회 김천지회의 설립과 운영에 깊이 개입하였다.
[의의와 평가]
김천의 청년 운동은 금릉청년회에서부터 시작되어 김천청년동맹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지역 사회의 봉건 풍습을 타파하고 근대적 시민 사회의 형성과 민족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지역 사회의 대중 운동과 사회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