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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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敎育 |
영어음역 | Geundae Gyoyuk |
영어의미역 | Modern Education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구한말에서 해방 이전까지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이루어진 근대식 교육.
[구한말]
김천 지역에서 근대 교육이 확산되는 시기는 대한 제국 시기 이후부터이다. 을사조약 이후 ‘근대 교육=국권 회복’이라는 인식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군수, 계몽 단체 회원, 상인 세력, 교회, 사찰 등 다수 세력에 의해 학교가 설립되었다. 김천 지역에서는 김천상업회의소·김천민의소·대한협회 김천지회·교남교육회 등과 같은 계몽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의 근대 교육 확산을 주도하였다.
대한협회 김천지회는 연설회·강연회를 개최하여 근대 교육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교남교육회에서도 근대 교육의 보급·확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교남교육회에 참여한 인물은 김산(金山)의 여영조·여중룡 등 25명, 지례의 배봉흠 등 3명, 개령의 이한영·허환 등 7명을 합쳐 총 35명이었다.
김천 출신의 교남교육회 회원들은 주로 을미의병 이후 상경하여 활동하던 유림이다. 이들은 주로 김산·지례·개령 등 김천 일대에 세거하던 양반 사족으로 을미의병 이후 상경하여 일찍부터 계몽사상을 접할 수 있었던 인사들이었다. 이들이 김천 지역의 사립학교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 인물로는 여영조·여중룡 등이었다.
특히 여영조는 『교남교육회잡지』에 일련의 글을 투고하여, 영남 지방 사립학교 설립 운동이 발전하는 배경을 설명한 후 이를 관내에 확산시킬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시기 교육 활동은 사립학교와 야학 설립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여중룡·여영조는 1907년 자신의 향리인 기동(耆洞)에서 향내 유지와 군수 임승학의 후원을 받아 양성학교를 운영하였다. 또한 여영조는 최창섭·이병구 등과 발기하여 1909년 5월 사립 김산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 김천상업회의소와 대한협회 김천지회 회원들이 함께 광흥학교를 설립하였다. 광흥학교는 상업 발달 및 민지 개발을 목적으로 한 김천시장의 상인 단체인 김천상업회의소의 회원 안덕일·문하영·석태형·김도홍·박래윤 등이 발기하여 설립을 주도하였다. 김천상업회의소 회원들은 대부분 대한협회 김천지회 회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협회 김천지회 부회장 박지화가 김천상업회의소 회두, 평의원 이종병이 부회두, 간사원 정치순이 평의원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 단체들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대부분 김천 지역의 대·소상인층이거나 지주층이었다.
김천 지역의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한 또 하나의 층은 군수들이었다. 경상북도관찰사 신태휴가 고종의 ‘흥학조칙’에 부응하여 ‘흥학훈령’을 공포하여 관내 41개 군내에 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당시 ‘근대 교육 시행=의무’라는 인식이 군수들 사이에 널리 파급되어 1909년 3월 1일 설립 인가를 신청한 관내 사립학교만도 155개교였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김천 지역에서도 개령군수 이재택이 의연금과 향교답을 기반으로 하여 1908년 개진학교를 설립하도록 했으며, 김산군수 임승학도 내탕전과 유림들 의연금으로 양성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또한 지례군수 김황진은 관내 21개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자신의 중요한 업무라고 생각하여 1906년부터 관내에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에 지례 광흥학교, 지례 읍내 교리 일중학교, 지례 동면 광동학교, 서면 창흥학교, 남면 보성학교, 북면 육영학교를 설립하였다. 김산군수이자 대한협회 회원이었던 이승하도 1909년 김천면 증하리[추정]에 황남학숙을 설립하였다.
김천 지역의 유지층들도 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개령군 남면의 이만호 등의 유지들이 1909년 금오산에 달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종교계에서도 사립학교 설립 운동에 동참하였다. 선교의 일환으로 미국 북장로회에서 1901년에 아포면 송천에 송천학교를, 부해리가 세운 송천교회에서 1902년에 양성학교를 설립하였다. 복전교회는 1908년 대항면 복전동에서 기독 명성학교를, 천주교회는 1909년 김산군 김천동에서 성의학교를, 동부교회는 1910년 개령면 동부동에서 영진학교를, 광기교회는 같은 해 감천면 광기동에서 광진학교를 각각 설립·운영하였다. 직지사에서도 승려들 자질 향상과 청소년을 위한 직명학교와, 그 부설로 야학을 설립하였다.
구한말 김천 지역에 세워진 학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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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근대 교육 기관으로 야학도 점차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야학은 사립학교·서당 등과 달리 1913년까지 법률적인 제재를 전혀 받지 않았다. 통감부 설치 이래 일제는 보통 교육 보급을 구실로 식민 체제 기반을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가 사립학교령[1908] 등을 공포하여 민족 교육을 억압하자 사립학교 설립 운동이 전반적으로 부진해졌다. 이에 야학은 민지 계발과 문명 사회 건설을 위한 새로운 대안 중 하나였다.
김천면 유지 안덕일·김성필 등이 광흥학교 내에 노동야학회를 설립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근로 청소년에게 시대 변화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개령군 서부 문철한은 개진학교 학감으로 재직하면서 노동자를 위한 국문 야학을 설립하여 근로 청소년에게 올바른 가치관·국가관을 배양시키려고 하였다. 개령군 서면 부암리 보성학교 학생인 우정태도 자기 동네에 야학을 설립하였다. 직지사도 직명학교 부설로 야학을 설치하여 학령 아동의 구제에 노력하였다.
[일제 강점기]
1. 초등 교육 기관
일제는 조선교육령, 사립학교규칙, 서당규칙을 공포하여 민족 교육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사립학교와 야학 등을 탄압·약화시켰다. 이와 더불어 1910년대 6면 1교제, 1920년대 3면 1교제, 1930년대 1면 1교제 등 기만적인 공립 보통학교 설립 정책을 통해 우리민족의 교육 열기를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에 설립된 공립 보통학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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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등 교육 기관
일제 강점기 일제는 우민화 정책을 통해 우리 민족을 통치하려고 했기 때문에, 중등 교육 기관 설립을 인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 전 기간 중등 교육 기관이 설립되지 못한 지역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김천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중등 교육 기관이 많이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그 종류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성의학원, 금릉학원, 김천고등보통학교, 김천공립고등여학교, 김천공립상업학교가 있었다.
1907년 3월 1일 천주교 김천황금성당의 아릭스 신부와 이병재가 황금동 76번지에 성의학당을 개설하였다. 교사 김상기·이상립·박기용 등이 학생들에게 한문, 일본어, 산수 등을 가르쳤다. 초기에는 2년제 학교로 약 8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하다가 1911년 3월 9일부터 여학생도 모집하였다. 1917년 10월 11일에 학교명을 성의학원으로 변경했으며 일제 강점기 내내 김천 지역의 대표적인 중등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광복 후 1950년에 중학교로 학제가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성의중학교, 성의여자중학교, 성의고등학교, 성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김천 지역 민족 교육의 대표적 교육 기관은 금릉학원이다. 금릉청년회가 민족 사상을 함양하고 항일 독립의 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22년 11월 12일 금릉청년회관[현 김천초등학교 동편 정문]을 건립하면서 금릉학원을 설립하였다. 1924년 신학기에 보통과 1·2·3부, 고등과 1·2부로 모두 5학급 230명을 모집하였다. 보통과는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미 취학자를 위해, 고등과는 고등보통학교[현 중·고등학교] 미 취학자를 위해 개설되었다.
금릉학원의 운영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청년회가 처음부터 좌우합작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학교 운영에 있어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총회에서 좌익계가 신입생 연령 제한을 폐지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좌우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고덕환을 주축으로 한 우익계가 청년회 임원직을 사퇴함에 따라, 좌익계가 금릉학원 운영을 위한 특별회를 조직하여 금릉학원을 운영하였다. 2년 뒤부터 운영권을 우익계가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민족 교육 기관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금릉학원도 끊임없는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을 견뎌야 했다. 1926년 재정난에 빠진 금릉학원을 정상화기 위해 운영권이 고덕환을 중심으로 한 우익계로 넘어갔으며 7월에는 김천의 각 사회단체들이 금릉학원 유지회를 조직하였다.
민족 교육의 산실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호시탐탐 금릉학원을 폐교시키려고 하였다. 첫 번째 시도는 1927년 12월에 일어났다. 1926년 12월 16일 강사였던 김수길·백기만이 공산당 좌익 활동에 가담하였다는 구실을 내세워 백기만을 구속하고 석태형에 대해서는 지명 수배를 내렸다. 이와 더불어 금릉학원 임원진을 모두 불러 심문하려고 했다. 이때 임원들이 경찰서 진술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비밀리에 회합하고 대비하여 더 이상의 구속은 없었다.
또 한 번은 1929년 2월 초 일제에 의한 강제 폐쇄령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사설 강습소의 규모가 방대한데 비해 경비 수입이 불확실하다는 이유였다. 금릉학원 폐쇄가 여론화되자 결국 일제는 폐쇄 3개월 만에 금릉학원을 다시 개원해주었다. 1932년 9월 22일 금릉학원은 주간부 학생 400명을 그대로 인수하면서 야간부를 추가로 개설하였다.
또한 1933년 5월부터 황금동 수원지 앞에 있는 양잠전습소의 부지 8925㎡를 빌려 학원 실습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해져 결국 광복 때까지 휴교하였다. 광복 후에는 몰려드는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3부제 수업을 하는 동시에 야간을 이용하여 성인 교육도 진행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교사가 불타 없어져 개교 27년 만에 폐교하였다.
1931년 3월 17일 김천고등보통학교가 고등보통학교 5학년제로 인가되어 5월 9일 개교하였다. 김천고등보통학교는 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 민족 교육의 산실로 설립자 최송설당이 학교 설립에 필요한 부지와 금전을 제공함으로써 설립되었다. 일제가 민족 교육을 약화시키기 위해 실업학교 설립을 주장하자 최송설당이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민족 사상 교육을 시키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는데, 그 목적이 아니면 재산 기부를 취소하겠다”라고 표명할 정도로 민족 교육 기관의 설립을 열망하였다. 김천고등보통학교는 현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35년 4월 2일 지금의 중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학교인 김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서 김천공립고등여학교가 개교식을 올렸다. 1931년 한국인 사립학교인 김천고등보통학교의 설립에 대응하여 김천·상주·선산 등지의 일본부인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다. 1936년 7월 11일 지금의 김천여자고등학교 자리인 김천시 모암동 100번지에 목조 교사를 신축하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김천공립고등여학교는 현 김천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42년 3월 31일에는 실업계 중등 학교로 김천공립상업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역시 김천고등보통학교의 설립에 대응하여 일본인 남성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김천공립상업학교는 현 김천농공고등학교의 전신이다.
3. 유아 교육 기관
1920년 9월 20일 금릉청년회가 금릉유치원을 설립하였다. 김천초등학교 동쪽 정문에 가정집을 빌려 시작했으며 발기인은 대부분 금릉청년회의 회원이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수익금이 부진하고 유지 회원의 탈퇴가 늘어나면서 유치원 경영을 이정득 혼자 도맡다시피 하였다. 1928년 1월 27일 이정득 명의로 인가를 얻어 6·25전쟁에 소실될 때까지 1500여 명의 원아를 길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