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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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逴 |
영어음역 | Jeong Tak |
이칭/별칭 | 유중(悠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 15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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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564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해주(海州) |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유중(悠仲). 아버지는 정란이다.
[활동 사항]
정탁(鄭逴)[1517~1564]은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에서 태어났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때 이이, 김성일, 이원익 등과 동방(同榜)이라 교분을 맺고 학문과 도의를 강마하여 친분이 두터웠다. 일찍 노비 문제로 권문세가로부터 무고를 당하였지만, 향리뿐 아니라 사람들이 관에 그 억울함을 진정하였다. 특히 교분을 맺은 이이를 비롯한 제현들이 왕에게 나아가 정탁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무죄가 밝혀지기도 하였다.
정탁은 필법이 뛰어났는데, 어느 날 성균관 유생들이 손바닥만한 종이를 내 놓고 “우리들 중 누가 여기다 율시 40구를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정탁이 자신이 쓸 수 있다고 하자, 유생들이 “그대가 우리 중에서 가장 잘 쓰면 우리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우리 중에서 장원이 나면 자네가 술자리를 마련하기로 하세.”라고 말하면서 내기를 걸었다. 글씨를 다 쓴 후 대제학이 심판을 하였는데, 정탁이 장원으로 뽑혔다. 또한 매우 청렴하여 전형적인 선비로 한평생을 살다가 작고하였는데, 장례비가 없어 장례비가 없어 제현(諸賢)들이 부의(賻儀) 물품을 보내고 방백(方伯) 및 인근 수령이 도움을 줘 장례를 치를 정도이었다.
[묘소]
묘소와 관련되어서는 전해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 병조판서에 증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