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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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明洙 |
영어음역 | Han Myeong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황금동 185-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 1893년 1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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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919년 5월 5일 |
몰년 | 1966년 3월 12일 |
추모 | 2006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황금동 185-7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한명수(韓明洙)는 1893년 1월 1일 김천시 황금동 185-7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김천면 황금정교회(黃金町敎會) 소사로 있던 27세의 한명수는 평양, 서울 등지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같은 교회 조사 김충한(金忠漢)과 대구에서 3·8 만세 운동에 참여한 계성학교[현 계성고등학교] 학생 김수길(金秀吉), 같은 교회 장로 최용수(崔龍洙)와 함께 김천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3월 9일 밤 남산정(南山町) 최용수의 집에서 박태안(朴泰安)·주남태(周南泰)·김원배(金元培)·차경곤(車敬坤)·김성집(金聖執) 등과 함께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협의하였다.
김충한·김수길은 조선 독립에 관한 경고문을 기초하기로 하고, 최용수·김수길·박태안은 인쇄를 담당하고, 최용수는 이 인쇄를 위해 방 하나를 제공하고, 김수길·박태안은 그 등사와 분포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또 김수길은 베로 된 태극기를, 주남태·김원배는 종이로 된 태극기를 만들기로 하였다. 그들은 3월 11일 오후 3시 김천면 욱정(旭町) 감천교(甘川橋) 부근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날 거사의 순서는 먼저 조선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후 그곳에서 경고문을 군중들에게 배부하고 포제(布製) 태극기를 선두로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김천 시내를 행진하기로 하였다.
시위 주동자들은 실행 방법을 결정한 후 3월 10일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서둘렀다. 한명수는 3월 10일 김천군 금릉면 누동(樓洞) 예수교회당에서 김재위(金在緯)에게 3월 11일 오후 3시 김천면 욱정 감천교에서 결행될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하였다. 김충한은 김수길이 교회당에서 빌려 온 등사판을 이용하여 경고문 약 300매를 등사하였다. 또 주남태·김원배는 종이 태극기 약 50본을 만들어 3월 10일 오전 9시 황금정 한상태(韓相泰)의 집으로 가서 김천공립보통학교 학생 한정리(韓定履)·석동준(石東俊)·박희철(朴喜徹) 외 여러 명을 만나 다음날 일으킬 의거를 설명한 후 학우들과 같이 많이 참석하도록 권유하면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또한 한명수는 김천군 금릉면 교동 예수교회당에서, 김재위(金在緯)는 같은 예수교회당에서 허학선(許學善) 외 두 명에게 다음날 의거에 참가하도록 일러두었다.
3월 11일 아침 석동준은 받은 태극기 가운데 16본을 들고 김천공립보통학교로 가서 학생 김종호(金鐘昊) 외 여러 명의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오후 3시에 태극기를 들고 의거에 참가하도록 일러두었다. 그러나 거사 직전인 3월 11일 오전 11시 일본 경찰에 시위 준비가 발각됨에 따라 만세 시위는 실패로 끝났으며, 이때 한명수도 체포되었다. 당시 재판에 회부된 주동 인물로는 한명수를 비롯하여 김충한·최용수·주남태·김원배·박태안·석동준·김재위·차경곤·김성집이 있었다.
김충한은 징역 2년을, 최용수는 징역 1년 6개월을, 주남태·김원배·한명수·차경곤은 징역 10개월을, 박태안은 징역 6개월을, 김재위는 징역 4개월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중 김성집은 무죄 확정을 받았다. 한명수는 1919년 5월 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징역 10개월을 확정 받았으나 10개월 20일을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한명수는 2006년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