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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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橋里彌勒 |
영어음역 | Seokgyo-ri Mireuk |
영어의미역 | Seokgyo-ri Maitreya |
이칭/별칭 | 하바위,좆바위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불상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석교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화섭 |
성격 | 풍수 비보 입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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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일시 | 조선 후기 |
제작지역 | 고창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60㎝ |
소장처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석교리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석교리에 있는 조선 후기 풍수 비보 입석.
[개설]
석교리(石橋里)는 조선 순조 때에 전주이씨가 처음 터를 잡은 마을이다. 석교리는 처음에는 마을 뒷산의 지형이 풍수상 지네 형국이라서 옹동이라 하였으나, 마을 앞에 돌다리가 생겨나면서 석교리로 마을 명칭이 바뀌었다. 석교리 마을 입구에 남근석이라는 입석이 있었는데, 이 입석을 석교리 미륵이라고 부른다. 이 남근석은 석교리에 거주하는 하씨 집안에서 대를 잇고자 남근석에서 득남 기원 의례를 지속적으로 해온 끝에 아들을 얻었다 하여 마을에서 하바위라고 불렀고, 자연석의 선돌이 마치 미륵불처럼 생겼다 미륵이라고도 불렀다.
[형태]
석교리 미륵은 자연석으로 된 선돌인데, 그 형상이 마치 발기된 남자 성기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미륵부처가 서 있는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크기는 높이 160㎝, 두께 50㎝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처음에는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마을 뒤쪽 야산에 세워놓았다.
[특징]
석교리 미륵은 하바위, 미륵, 좆바위로 불리고 있다. 선돌의 명칭이 다르게 불리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하씨 집안에서 득남을 기원하기 위해 섬길 때 미륵불로 섬긴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각종 사회적 재앙으로 전염병이 만연하면서 가문의 대를 잇는 가계 계승 의식이 강렬하여, 난세를 구원할 미륵불의 출현을 기원하는 미륵 신앙이 성행하였고, 각각의 집안에서는 혈연의 대를 이을 득남을 기원하기 위하여 미륵불을 찾아 기원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석교리 미륵은 그 이름이 붙여지기 이전에는 풍수 비보적 성격의 남근석이었다. 석교리 건너편 마을인 부안면 구연리 국고개마을의 앞산이 마치 여성 생식기의 공알 형상 지형을 하고 있고, 이 공알바위가 석교리에 비치면 마을에 음풍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음기를 눌러주는 방편으로 석교리 마을 입구에 발기된 남근 형태의 입석을 세워놓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석교리 미륵은 석교리 사람들과 구연리 사람들의 대립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는데, 구연리 사람들이 넘어뜨리면 석교리 사람들이 다시 세워놓고, 석교리 사람들이 세워놓으면 구연리 사람들이 넘어뜨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마을 간의 갈등을 없애기 위하여 석교리 사람들이 마을 뒤쪽으로 옮겨 세워놓았다.
[의의와 평가]
석교리 미륵은 조선 후기 자연의 재앙에 따라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던 당시에 성행하였던 마을신앙의 단면을 보여준다. 석교리 미륵은 풍수지리적 재앙을 방지하고자 여근곡의 기운을 상쇄하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남근석을 세워 비보를 한 입석인데, 이 입석을 대상으로 득남을 기원하면서 미륵불로 섬겼으며, 민중의 생활상과 신앙 형태를 보여주는 독특한 사례라 할 수 있다.